Sunday, August 20, 2017

Paris_2017 파리여행기 - 7 - 몽마르뜨

어제에 이어 오늘도 2시간정도 낮잠을 잔다. 마치 하루를 두번씩 맞이 하는 것 같다. 오후에는 몽마르뜨로 방향을 잡고 나선다. 아침의 인터뮤제 사태에도 불구하고 어디론가 이동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글지도를 필요로한다. 구글지도를 검색하여 타고 갈아타고 내려야할 역들을 검색하는 일은 나에게 맡겨져있다. 와이프가 구글 지도에 언덕 꼭대기에 있는 성당 사크리꿰르(Sacré-Cœur)를 목적지로 넣어서는 안되고, Abbesses 역을 향한 경로찾기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몽마르뜨에 걸쳐있는 역이 많은데, Abbesses역을 출발점으로 하는 여행 경로를 여행책자에서 읽었나보다.
Abbesses 역에 도착하니 여타의 다른 역들과 사뭇 다르다. 다른 역들이 매우 지저분하고 별다른 장식이 없는 거치른 상태에 있다면, 이 역은 제법 잘꾸며져 있다.


그리고,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길다.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제법 숨을 몰아쉬어야 한다.  지상으로 나오니 과연 소위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의 전철입구 장식이 있다.

아르누보 양식 특유의 엿가락 늘어지는듯한 철골 구조는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장식들을 통해익숙하다. 1910년대의 유행으로 식물과 동물등의 유기물의 형상들을 각종 장식과 구조물에 멋스러움의 중심으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엿가락이란 느낌을 애써 지우면 어떤 밀림의 휘영청 늘어진 가지들과 어느 이국 식물의 잎사귀란 느낌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파리에는 총 3개의 아르누보 양식 전철역들이 남아있으며 Abbesses역이 그중 가장 유명한 하나라고 한다.

몽마르뜨 언덕길의 시작이다.

몽마르뜨(Montmarte)란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 지역이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Mount of Mercury 또는 Mount of Mars라고 불리웠다는 대서 유래된 것이 있고, 파리의 가장 그로테스크한 성인, 조각상에 항상 자기 목을 들고 등장하시는 Saint Denis란 분, 로마시대에 루테리아인들에게 기독교를 설파했다는 죄목으로 몽마르뜨에서 목이 잘리우는 형벌을 받아야 했으나, 목이 잘리자 일어나서 자기 목을 손으로 들고 걸어서 사라졌다는데, 이 사건 이후로 사람들은 이곳을 성자의 산(Mont des Martyrs)으로 불렀다고 한다.
아래 그림은 생드니가 목이 잘리우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루브르에 있는 그림이다. 2년전 루브르에서 어떤 끔찍한 느낌이 와서 찍어두었는데, 이분이 Saint Denis인지는 그당시에는 몰랐다.


19세기까지만 해도 파리가 아니었고, 풍차 이미지가 말해주 듯 돼지와 닭 사육장이 있던 근교 농업지대였는데, 파리랑 가까우면서도 값싼 렌트비 때문에 돈없는 예술가와 문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파리 예술의 중심이자 파리가 유럽 전체 미술을 선도하게 되면서 유럽 예술의 중심이되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라면 피카소라 할 수 있겠다. 그가 여기 살았었다. 근대에서 현대 미술로 넘어오는 가장 중요한 이정표라 할 수 있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여기서 그렸다고 한다.

불어를 전혀 해석할 수 없다만, 피카소가 살았던 곳이고 아비뇽의 처녀가 언급되고 있는 것 같다. 와이프한테 아니 아비뇽은 바르셀로나에 있는 길인데 왜 여기서 그렸데?라고 물었다가 바보같은 질문이라며 핀잔을 엄청 들어야했다.

몽마르뜨 곳곳에 이런 거리의 낙서들이 많다. 화염병들고 튀쳐나올 것 같은 여전사를 여기서도 만나네











그리고, 피카소급으로 유명하신 이분 달리의 상설 전시관(Espace Dalí)이다. 그의 연인(?) 시인 로르카가 총살로 처형 당하는 스페인 내전의 소용돌이 기간 동안 달리는 파리에서 초현실주의에 몰두해있었을 뿐이었다. 그 비극적인 현실을 초월해 계셨던거다. 뭐 예술가의 예술세계를 뭐라할 수 있겠냐

거리의 화가들인데, 글쎄 예술을 추구하시는 것 같지는 않고 관광객들의 주머니를 주로 노리시는 듯


이 곳에서는 성당이 2군데 있다. 성스러운 심장이라는 뜻의 유명한 사끄리꿰르 말고 생 피에르 성당이란 곳이 하나 더 있다. 이곳은 로마시기의 Mars 신을 모시던 사당이 있던 자리에 3세기경 위에서 언급한 생드니가 교회를 처음 세웠다고 하고, 이 교회 내부에 로마 시대의 기둥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 성당 역시 프랑스혁명으로 파괴된 뒤 19세기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교회 내부 로마시대 기둥을 봤어야 했는데, 방문시에는 그런 사전 지식이 없어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성당에서 진정 눈길을 끌었던 것은 색다른 포즈의 성모상이다. 보통의 성모상은 팔을 양옆 팔자 모양으로 벌리고 세상을 사랑으로 품는 어머니의 모습인데, 이 성모상은 자신의 가슴을 감싸안고 있다. 표정도 사랑을 느낀다기 보다는 눈을 감고서 큰 슬픔을 위로하는 듯하다. 찾아보니 "Our lady of beauty (Notre-Dame de Beauté)"라고 예술가들의 수호성인이라고. 하지만, 이곳에서 파리코뮨으로 희생된 숱한 죽음들의 넋을 기리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잠깐 해보았다.

성스러운 느낌보다는 그로테스크한 엽기라는 인상이 더 강열하다. Saint Denis

이 성당을 돌아서 오르니, 드디어 그 성당이 장중한 모습을 드러내지만, 사끄리꿰르에 바로 올라가지 않고, 몽마르트 박물관을 먼저 들러보기로 한다. 왜냐면 박물관은 6시에 문을 닫지만 성당은 8시까지 내부를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은 르느와르, 발라동과 위트릴로 모자가 살았던 실제로 살았던 아파트, 그들이 작업했던 아트리에가 있던 그 건물에 박물관을 꾸며놓았다. 그래서 르느와르가 그렸던 이 곳 실제 정원을 르느와르의 그림과 정원 곳곳에 대비시켜 놓았다.





르느와르의 '그네' 그림의 실제 그 그네다. 르느와르의 그림은 항상 밝다. 그가 그렸던 몽마르뜨는 항상 화사하다. 이 그네 그림도 그렇고 내가 좋아했던 Dance at Le moulin de la Galette 같은 그림도 그렇고. 그런데 르느와르가 이 그림을 그릴 때의 몽마르뜨는 희생과 좌절을 경험하고 있던 때였다. 이곳에 근거지를 둔 코뮨세력이 보불전쟁에 패한 프랑스 군대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 당하고 나서의 좌절에 빠진 몽마르뜨를 이렇게 화사하게 표현했다는 것은 르느와르의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보불전쟁의 패색이 짙어지던 중 공화제를 선포하고 항복 휴전 반대를 외치며 열기구로 파리를 탈출하는 강베타( Léon Gambetta). 파리를 탈출해서도 계속 프러시아에 대한 항전을 계속한다. 하지만, 이 사람은 코뮨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몽마르뜨에 이 그림이 있는 이유는 아마 열기구 출발 장소가 몽마르뜨여서인 것 같다. 이 사람의 유골은 나중에 팡테온으로 모셔진다.

사끄리꿰르와 같은 무거운 건축물을 연약한 몽마르뜨 지대에 어떻게 건설해야 했는지 기초 공사를 보여주는 당시의 설계도

당시 몽마르뜨를 보여주는 흑백 사진들


파리 최초의 캬바레 검은 고양이(Le Chat Noir) 무대에서 각종 공연이 벌어지는 동안 음주를 즐기는 성인 오락 공간이다. 이런 류로는 세계 최초가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의 다양한 선전 포스터들을 전시해놓았다.



당시의 바 모습을 재현한 장소

검은고양이 캬바레를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이미지인 듯 싶다.

캬바레 현장을 묘사한 만화

붉은 당나귀(L'ane Rouge) 라는 캬바레. 검은 고양이에서 떨어져나와 검은 고양이와 경쟁관계의 캬바레였다고 한다.

중국식 그림자 극이 유행했었고 아주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건 그림자 극을 위한 콘티?

검은고양이 캬바레의 일본 우키요에 판화 스타일 포스터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만이 일본을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프랑스 전체가 일본 광팬들이었네. 역시나 로트렉 또한...


로트렉은 물랑루즈 포스터 전속 화가로 계약이 되었다


캉캉이란 춤이 탄생한 믈랑루즈

당시의 유명한 캉캉 댄서 라굴리 La Goulue. 위에 있는 로트렉의 포스터에도 이름이 등장한다.



박물관이 거의 문닫을 시간이 되었음을 박물관 가이드하시는 중년 신사분이 알려주신다. 알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이제 나서려고 하는데, 아뜨리에를 꼭 봐야 된다며 남아 있는 시간의 촉박함과 서로 불편한 언어인 영어로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불안으로 몸소 직접 우리를 안내하여 아뜰리에로 데려가 주신다. 오늘 아침의 인터뮤제에서 해프닝, Navigo를 도와준 아가씨, 그리고 이 박물관의 가이드. 프랑스 사람들은 무례하다는 명제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말도안되는 소리인가 싶다.

그분의 친절한 안내로 볼수있게된 벨라동과 위트릴로의 아틀리에


박물관을 나서면서 영업이 끝난 식당에서 정원을 바라보며 우연히 찍게 되었는데 마음에 드는 사진이 되었다.

이제 사끄리꿰르다.
우리 일정 상의 첫 "유명" 관광지이다. 이 관광객들을 어떻게 출연안시키고 성당만 오롯이 찍어낼 방법은 당연히 없을 것 같다. 언뜻 느낌에 상당수가 중국에서 여행온 사람들 같고, 한국사람인 듯이 보이는 사람도 많다. 어쨋든 이 사진에 보여지듯이 한국 사람과 중국 사람을 합쳐서 압도적으로 동아시아 인들이 많다. 그러면 의문이 생긴다. 여기 샌프란시스코 bay area에서 백인보다도 훨씬 더 많이 마주치는 인도인들은 여기에 왜 없을까? 이런 유명 관광지 뿐아니라 파리 전체에서 잘 만나기가 어렵다. 사실 아랍 사람들과 인도인들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나, 그렇게 많은 아랍 사람들 속에서 인도인으로 느껴지는 사람들은 잘 없는 것 같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인도인들에게는 EU 방문 비자가 매우 까다롭다고 한다. 비자 신청에서 발급까지 7일이 넘게 걸린다. 왜 특별히 인도에 대해서 까다로운지는 잘 모르겠다. Quora 같은 곳에 물어봐야 하나.

성당의 정면은 프랑스의 애국주의를 상징하는 두 성인의 조각상이 버티고 있다. 십자군 시대 중세의 왕 루이9세와 역시 중세의 영웅 잔다르크. 이 성당을 이 자리에 그 많은 돈과 시간을 써서 지어올렸던 힘의 원천이 되는 이데올로기가 프랑스 카톨릭 애국주의에 바탕을 둔 우익 보수주의임을 상징하고있다.
파리코뮨이라는 처참한 계급갈등을 겪고 나서 카톨릭 보수 우익들은 파리코뮨의 온상이었던 자리 몽마르뜨에 화려하고 웅장하기 그지없는 상징물을 세워 불온의 죄를 씻고, 앞으로도 반역과 배교의 싹이 결단코 자랄 수 없도록 성령의 빛을 쬐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코뮨의 죄를 씻어내자는 호소는 아주 호응이 커서 당시 7백만프랑의 공사비를 순전히 기부금을 통해서만 마련하였다고 한다. 손에서 화약냄새만 나도 바로 즉결처형해서 다 죽여놓고 또 무슨 죄를 씻어내겠다고.
목소리가 크고 행동이 앞섰던 혁명가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고, 제도와 사상을 바꿔놓고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지지만,  죽음으로 수립시켜놓은 민주적 절차에 따른 결정에는 정작 프랑스 국민들이 가장 보수적인 선택들을 해왔던 것 처럼, 보수주의의 힘은 소리없이 무서운 것이었다.

어깨에 잔뜩 힘을 주어 권능의 힘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루이9세 조각상이다.
반역자에게는 신의 심판을! 그런데 파리코뮨 세력들은 정작 당시 정부군을 반역자라고 불렀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성당에 묘사된 예수님은 좀 화가 나 있는듯하다.

물론 이 각도에서 보면 아주 장엄하다.

이 성당의 오르간도 아주 유명한데, 아주 우수한 음색을 자랑한다고 한다



이 성당과 이런 저런 밀접한 인연이 있는 카톨릭 위인들이 한장의 그림에 다 모여있다.
왼쪽부터 교황 존23세, 테레사 수녀, 알제리의 순교자 샤를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 그리고 우리 어린 시절의 교황 요한 바오로2세. 바오로2세는 재임기간이 너무 길어서 어린 시절 교황은 바오로2세 밖에 없는 줄 알았다. 1984년 전두환 정권하의 한국을 방문하여 여의도 광장에 100만 인파를 동원했다.

여기에 서면 파리 시내가 남쪽으로 한눈에 다 보이는데, 날이 흐려서 사진은 좀 칙칙하게 찍혔다. 퐁피두 센터가 보인다. 그리고 왼쪽에 내가 개인적으로 이번 파리 여행에 가장 인상 깊었던 건축물인 미테랑 도서관도 보인다.

성당에 가려면 왼쪽 사진 처럼 가파른 계단을 힘겹게 올라갈 수도 있고, 오른쪽 사진처럼 줄을 서서 기다리겠다면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갈 수도 있다. 두 사진 모두 중국 관광객으로 가득 찼네

  

이제 믈랑루즈로 향해 열심히 가고 있는데 와이프가 중요한 한군데를 놓쳤다면서 성화가 대단하다. 왜 아무 생각없이 가기만 하냐고. 진정을 시키고 거기가 어딘지 확인해서 찾아가보니 평범한 카페다. 하지만, 아멜리에 영화 촬영장소로 유명한 카페다. 저 안쪽으로 오드리 도투의 사진이 보인다. 십수년전에 재미있게 본 영화이지만, 역시 스토리가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만 어쨋든 여기서 맥주 한잔하기로 한다. 와이프는 최근에 다시 이 영화를 넷플릭스를 통해서 봐서 그런지 감회가 있는듯



맥주 한잔하고 나섰더니, 비가 온다. 우디알렌 영화 midnight in Paris를 보면 마지막 장면에서 비가 쏟아지는데 새로이 로맨스를 시작하는 남녀 주인공 둘이서 함께 쏟아지는 비를 개의치않고 맞으며 걸어가면서 영화가 끝난다. 남자주인공(오웬 윌슨)은 비에 젖은 파리가 가장 아름답다고 굳게 믿고 있다. 나도 비 맞는 걸 크게 게의치 않으니 그 녀석 흉내나 내볼까하면서 걸어가보고 싶지만, 와이프는 질색이다. 남의 가게 천막 밑에서 비를 피하며 비에 젖은 몽마르뜨 거리를 사진에 담아본다. 아멜리에 카페에서 세어나온 조명들이 비에 젖은 조약돌 포장위에서 반사되고 있다.


믈랑루즈에 도착은 했는데, 뭐 티켓도 없고하니 가게 사진만 찍고 이제 숙소로 돌아간다. 티켓은 엄청 비싸다. 몇백유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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