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딸이 지난 5주 동안 묵었던 숙소에서 나와야 하니, 짐을 우리가 묵고 있는 airbnb 숙소로 옮겨와서 우리랑 지내야 한다. 아침에는 딸이 짐을 빼는 것을 도와주기로 한다.
Vaugirard 라는 동네에 있는 학생들 숙소.
짐을 가져다 놓고, 우리는 시테섬으로 걸어내려간다.
내려가면서 Hôtel de Ville 사진을 한장 더 찍는다.
노틀담 성당 앞에 도착했다.
노틀담 앞에는 사람들이 또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몇주전에 발생했던 테러에 아랑곳하지 않고 입장을 위해 끝이 안보이는 줄을 늘어뜨려놓고 있다. 역시 테러에 대한 경계로 경찰들이 많이 눈에 띄는데 특이하게도 자전거를 이용하고 있다.
노틀담에 왔으니 정문을 사진에 담아본다.
엽기적 포즈의 파리 최초의 순교자 생드니
아래는 천국과 지옥의 비교인가? 이 Tympanum의 제목이 최후의 심판이니, 심판의 날에 벌어질 일들을 묘사한 듯 싶다. 천국의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행복해보이지는 않는다. 너무 정적이고 무표정하지만, 지옥에는 많은 활동들이 전개되고 있고 익살스러운 다양한 표정들이 있어서 더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조각들을 어제 기념물 박물관에서 봤던 중세 조각들과 비교해보면, 너무 솜씨가 차이가 많이 난다고 생각을 했는데, 역시 1845년부터 진행된 25년간의 복원 공사 과정에서 원본을 복제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아마 원본은 혁명등의 정치 격변을 겪으면서 많이 훼손되었을 것이다.
원본은 아마 중세박물관에 있었을텐데 내가 놓쳤었나보다. 이 지옥도 중에서 19세기 복원자의 불온한 사상이 드러나는 것 같다고 하는건 내가 너무 넘겨짚은건가? 오른쪽에서 두번째 열을 보면 부자, 비숍 그리고 왕이 뚱보 악마에 깔려서 고통받고 있다. 복원자는 Eugène Viollet-le-Duc 라는 사람으로 당시 중세교회 복원의 전문가였는데 원본과 너무 판이하게 복원하는 경향 때문에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 아이디어를 넣었을 수도.
대천사 미카엘이 영혼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다. 악마는 자기쪽으로 끌어내리는 꼼수를 피우고 있고, 저울에 올라있는 사람의 표정은 초조 불안하고 불쌍해보인다.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면서 사슬에 묶여 지옥으로 끌려가는 영혼들 중에는 역시 왕관을 쓴 사람이 보인다.
원본을 보고 싶다.
이 모자를 삐딱하게 푹 눌러쓴 불량스러워 보이는 소녀는 누구일까? 유대교를 상징하는 Synagoga라고 한다. Synagoga에 대별되는 상징은 Ecclesia이고 교회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래서 중세 성당을 장식할 때 이 두 상징의 소녀상들을 최대한 대비시켜서 세운다고 한다. 한명은 성스럽고 밝은 은총과 축복의 모습으로 십자가를 들고 있고, 또 다른 한명은 눈이 가리워진채 어둡고 절망적이고 비탄의 모습으로 토라나 계명이 세겨진 판들을 들고 있다.
왜 이렇게 유대교를 경계했었는지 당시에 유대교에 그렇게 라이벌의식이 강했었나 궁금해진다.
샤를마뉴 대제 동상이 길게길게 늘어선 관광객들의 줄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너무 무섭게 형상화를 해서 카리비언해적에 나오는 크라켄의 느낌이 난다.
모든 프랑스 고속도로의 0km 출발점 표지석 (Point Zéro des Routes de France)으로 노트르담 앞 광장 어딘가에 있다.
처음 노틀담에 왔을때가 2000년 9월이었다. 그때는 정말 줄도 굉장히 짧았고, 종이 있는 첨탑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한산해서 곧바로 올라가서 온갖 가고일을 실컷 봤었다. 그때는 또 한참 담배를 피울때라, 숨가쁘게 올라왔으니 담배 생각이 간절하여, 가고일 옆에서 목을 빼고 담배를 피우기까지 했었다. 물론 가이드한테 들켜서 혼났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글로벌 규범에 대한 아무런 감이 없는 철없는 어글리 코리언이었네. 어쨋든 그렇게 여유가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사람들이 갑자기 정말 미친듯이 늘어났을까.
노틀담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건 포기하고, "Archeological Crypt of the Parvis of Notre-Dame(노틀담 광장의 고고학적인 지하공간)"이라는 긴 이름의 박물관으로 간다. 노틀담 밑으로 지하주차장을 만들기위한 공사를 1965년부터 1972년 동안에 진행했나보다. 그때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로마시대 건축물 기초 부터해서 19세기에까지 시테섬에 있었던 건축물의 흔적들과 목없는 석상들과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석상 머리들 상당수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들 목없는 석상과 머리들은 중세박물관에 보내지고, 건축물들의 흔적들을 이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로마시대의 파리이다. 시테 섬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더 많은 도시가 발달해있고, 북쪽으로 지금 샤틀레 레알까지 시가지가 있었다. 로마황제 "배교자 줄리안(Julian the Apostate)"는 라틴지구에 있는 목욕탕에서 즉위식을 올렸었고, 파리에 근거지를 두었으니, 이미 4세기인 이 시대부터 유럽의 주요 도시였었다.
로마시대의 방어벽의 흔적이다.
로마시대 방어벽임을 증명하는 벽돌
로마시대 조각상. 그리스 로마 시대가 다 조각을 잘했던 것은 아니군
야만인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로마로 문명화된 파리를 지키는 성벽
로마시대의 파리 모습
로마시대 목욕탕
박물관 설명에 따르면 옛날에는 이 지점까지 물이 들어왔다고 하고, 여기는 항구였다고 한다. 그래서 루테리아 인들의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다고. 박물관은 그 당시의 활기찬 모습을 영상과 음향으로 재현해놓고 있다.
4세기에 저런 기중기를 썼다고? 정약용의 수원성 축조 때 기중기를 썼다고 배웠는데, 어떻게 된거지 혼란스럽네.
Left bank 그러니까 세느강 남쪽에 버려진 건축물들의 자재를 이용해서 시테섬을 보호하는 방벽을 쌓았다고 한다. 돌에 세겨진 글자들을 통해서 원래 돌의 출처를 추적할 수 있다고
1550년의 시테섬. 퐁네프 이전의 다리들 위에는 저렇게 집들을 지어 놓았다.
1740년의 Delagrive라는 지도 제작자의 파리 재개발 계획도. 18세기의 파리 모습을 알 수가 있다.
19세기 노트르담 복원 공사 현장 모습
이제 이 지하공간을 나와서 유태인 추념관으로 이동한다.
퐁셍미셀 다리에 있는 기념동판. 적혀있는 글귀는 다음과 같다.
"a la memoire des nombreux Algeriens tues lors de la sanglante repression de la manifestation pacifique du 17 octobre 1961"
변역을 해보면,
"1961년 10월17일에 있었던 평화적 시위에 대한 폭력적인 진압으로 죽임을 당한 알제리인들을 애도하며"
이 사건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 잘 없을 것이다. 나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알제리 독립을 요구하는 식민지에서의 요구에 대해 프랑스 정부는 매우 폭력적으로 대응을 하였다. 알제리 본국인들은 파리에 있는 알제리인들은 도대체 뭐하고 있냐고 프랑스에서도 독립을 지원하기 위해 일어서라고 호소하기 시작한다. 이에 호응하여 파리의 알제리인들은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는 시위를 1961년 10월에 가지게 된다. 약 30,000명 정도가 모였고, 철저한 평화시위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알제리해방전선의 테러로 인한 경찰의 사망사건으로 약이 오를대로 오른 경찰들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100명에서 3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게다가 이 사망자들의 시신을 세느강에 버려, 파리시민들은 세느강에 둥둥 떠다니는 시신을보고 질겁을하고 경악하게 된다.
당시 파리 경찰을 책임지고 있던 사람은 모리스 파퐁이란 사람이었는데, 사망자가 나와도 상관없으니 폭력 진압을 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사실이 현재 널리 인정이 되고 있다. 이 사람은 사실 비시정권의 경찰 간부이었기에 부역자였는데, 독일의 패배가 점점 명백해지던 1944년에 갑자기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면서 살아남는다.
후일 드골파가 되어 파리경찰을 책임지게 되면서 이런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파퐁은 이 사건으로는 기소를 당하지 않고 1981년 비시정권하에서 유태인들을 죽음의 캠프로의 이송에 협력했던 점이 결국 드러나 재판을 받기 시작하게 되었고, 무려 17년간의 재판 기간 끝에 1998년 유죄 선고를 받아 20년형을 언도받지만 건강을 핑계로 끈질긴 석방 노력을 기울여, 수감생활 겨우 4년만인 2002년에 석방되어 2007년 96살까지 살다 죽는다. 정말 전두환, 피노체트 같은 놈이다. 악마는 오래 산다.
프랑스 정부는 이 학살사건이 있은지 37년동안이나 사망자 발생에 대해 부인을 하다가 결국 1998년에야 사망자의 존재를 30명선에서 인정한다. 이 기간 동안 사회주의자 대통령 미테랑이 14년이나 장기집권했었는데도 말이다.
이 동판은 2001년 당시 사회주의자 파리시장 델라노(Bertrand Delanoë)에 의해 설치되었다.
다음은 시테섬에 있는 "Memorial des Martyrs de la Deportation" 이라는 유태인 강제 이송 추념관으로 간다.
며칠전에 보았던 2010년 영화 La Rafle (The Roundup)은 프랑스에서 자행되었던 유태인의 새벽 기습 검거와 벨로드롬에의 집단유치, 그리고 죽음의 캠프로의 강제 이송을 다루었다.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와서 눈물을 흘리며 영화를 볼 수 밖에 없었다. 그 영화를 보면서 가졌던 슬픔과 분노를 그대로 가지고서 추념관 안에 들어선다.
추념관으로 내려간다.
내려서자 갑자기 세상이 확 바뀌어버렸다. 조금전까지 나를 둘러쌌던 관광객들의 즐거운 표정과 바삐 돌아가는 파리 일상의 번잡스러움들, 세느강과 세느강을 장식하고 있던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모두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하얀벽과 가슴을 찌르는 슬픔과 절규를 표현하는 듯한가 금속 조형물만을 마주하게 된다.
헤아릴 수 없는 슬픔과 어이없는 죽음을 기리는 엄숙함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구나라고 나름 감탄한다.
이 추념관은 드골의 지시로 건축가 Georges-Henri Pingusson의 설계에 의해 1962년 조성되었다.
세느강을 볼 수 있는 창을 내어 놓았다. 희생자들의 혼령이 흐르는 곳으로의 연결인 듯하다
전체적인 디자인은 매우 절제된 미니멀리즘에 예리한 폰트와 예리한 상징물로 희생자들의 절규를 나타내었다.
나찌가 점령한 유럽 전역에 있던 캠프들의 위치를 표현했는데, 큰 폰트와 더 큰 붉은 점은 학살이 자행되었던 죽음의 캠프이다.
외부로 좁게 연결된 통로는 비극의 장소로 안내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저렇게 좁은 통로을 통해 지하무덤으로 들어간다.
벽 양옆으로 20만개의 크리스탈이 장식되어 있다. 프랑스에서의 희생자 숫자다. 끝의 불빛은 희생자의 실제 유골함이 안치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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