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ugust 23, 2017

Paris_2017 파리여행기 - 10 - 장식미술박물관과 루브르 야간개장

Dior 전시회가 열리는 장식미술박물관(Musée des Arts Décoratifs)은 루브르 서쪽 날개 건물에 있다. 도착하니 줄이 아주 길다. 거의 입장할 때가 다되어서 딸이 나타났다.

최근의 파리 테러 때문에 보안검색이란 과정을 모든 박물관 입장 시 거쳐야 한다. 이 보안검색을 거치면서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경험을 블로그에 올려야 하나 조심스러운데, 어쨋든 이런 일을 당할 수도 있다라는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간단히 정리해보기로 한다.
우리 가족이 입장하기 전에 보안 검색 요원이 교체가 되었다. 요원은 금속탐지봉으로 입장객들을 스캔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입장할 차례가 되었을 때 약간 기분 나쁜 탐지봉과의 접촉이 있었다. 이 녀석이 왜 이런 실수를 하나하면서 그냥 입장해서 표를 사려고 또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우리 딸이 씩씩거리면서 어디론가로 간다. 그러면서 박물관 담당자한테 아주 흥분해서 따지고 있다. 알고봤더니 우리 딸, 와이프도 같은 식의 접촉을 경험했던 거다.
즉시 분노하여 같이 따졌어야 하는데,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하나라는 당황스러운 생각과 우리 딸의 흥분부터 가라앉혀야겠다는 생각 밖에 안들었다. 박물관 담당자는 우리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하기는 했다만, 박물관을 관람하는 도중에 불현듯 화가 나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을 모욕 주려고 마치 실수한 척하면서 일부러 그랬구나란 생각이 구체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던거다.
항상 이런 식이다. 어떤 부당한 처우를 받았을 때, 순간 상황 파악을 못하여 화를 내야할 시점을 놓쳐버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스스로가 바보같다는 생각에 화가 더 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사실, 이런 식의 모욕은 교묘하게 화낼 시점을 이연시켜버리니 더 악질적이긴 하다.
최근 다시 분노한 기억을 떠올려 어떤 조치가 내려졌는지를 확인하는 메일을 박물관에 보내었다. 답장이 없거나 적절한 조치가 내려지지 않았다면 가능한 경로를 통해서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Dior 전시 대표로 선택된 옷



그런데 딱히 와이프랑 나랑은 Dior 전시가 끌리지 않는다. 표는 한장 딸을 위한 것만 사고, 입구에서 헤어져서, 딸은 Dior 전시를 보고, 우리는 장식미술 박물관 전시를 보기로 한다. Dior 전시는 우리딸이 찍어온 사진을 보는 걸로 대신하기로 한다.
장식미술 박물관은 루이14세 시절부터 최근까지의 장식용 가구, 도자기, 조각과 같은 실내장식 용 소품과 실내장식 자체 등을 시대별로 전시하여, 프랑스의 상류층의 생활 문화사를 통해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게 해놓았다.
아무래도 실내 장식을 다루다보니 가구가 압도적으로 많다.

루이14세 시절의 가구 다리가 8개인 콘솔

역시 루이 14세 시절, 사계를 상징하는 조각상, 춘, 하, 추 까지 동은 건너편에 있어서 함께 사진을 찍기가 곤란하다.

베르사이유 궁전에 가면 비슷한 양식의 가구들을 많이 본 것 같다. 루이14세 시절의 화려한 장식미를 강조한 콘솔

18세기에는 이국적인 장식이 유행했음을 보여주는 스핑크스 Hotel de Sully에 있던 거랑 비슷하다.

좀 으스스한 시계

루이15세 시절부터 마호가니에 대한 엄청난 짐착들을 보였다고 한다.


루이15세 시절의 화려한 실내장식을 재현한 방

루이15세, 왕의 흉상을 장식으로 가져다가 썼었네.

역시 비슷한 시기, 마음에 들어서 한장 찍어두었다.

루이 16세 시절 가구. 이 가구를 하나 만들기위해서 금세공 기술자, 파켓제작 기술자, 목공예기술자, 등등 당시 최고 수준의 기술자들끼리 서로 긴밀한 협력을 했을 것이다. 한 부분이라도 실수하거나, 서로 의도한대로 맞지 않는다면 이렇게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고도의 협업으로만 가능하지 않았을까

젊은 나이에 단두대에서 희생된 루이16세와 마리 앙뜨와네트. 이번 여행가기전에 나름 공부 차원에서 우리 어린 시절의 히트작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다시 다 읽었다. 이들의 어처구니 없는 안타까운 죽음에 프랑스 혁명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회의하게 된다.

가구에서 식기로. 루이16세까지는 여전히 바로크 적인 장식이 대세였다.

나폴레옹 시대로 넘어오면서는 고전주의적 양식이 유행을 한다.

죠세핀의 방



젊은 날의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혁명 후에도 최고권력자의 흉상이 장식으로 쓰이는 것은 여전한 유행이다.

나폴레옹의 의자. 권위를 지나치게 강조한 듯 싶다.

나폴레옹 3세로 넘어와서는 화려해진 고전주의를 보여준다.

빨간띠하고 파란띠가 프랑스 국기를 상징한다고

에밀졸라 소설 나나에서 묘사되었던 코르티잔의 화려한 침실



코르티잔과 수작거는 신사

바르셀로나를 통해 이제 제법 익숙해진 아르누보 양식이다.



이제 1920 ~ 1940 아르데코로 넘어가면서 전시는 마무리된다.

다음의 사진들은 우리 딸이 찍어온 Dior 전시회 사진들



어제는 프랑스 동료가 보내준 리스트중의 한 식당을 찾아가는데 실패했는데, 오늘은 딸이랑 저녁을 같이 먹으니 추천 리스트 중의 다른 식당을 시도해보기로 한다. 추천한 곳은 Triadou Hausmann 이란 곳이다.

딸이 주문하는 Vegetarian 메뉴는 통 기억을 할 수가 없다.

와이프는 프와그라를 시켰는데. 그냥 토스트에 프와그라 한 덩어리. 처음 먹어본다. Acquired taste 가 필요한 것인지, 독특한 풍미는 있지만, 그게 즐거움을 주는 맛인지는 잘 모르겠다. 미국에 와서도 멕시코 음식, 인도 음식 등이 맛있다는 것을 알게되기 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었다.

나는 프랑스식 스테이크를 시켰는데, 고기가 질기다. 스테이크는 뭐 스테이크다. 새로울 것이 없다.

디저트는 슈크림 크러스트 안에 아이스크림이 있고, 초코 시럽을 위에서 뿌려 먹게 되어있다.
추천받아 온 식당인데 맛있는 경험을 남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전체적인 주문에서 실패한 것 같다. 스테이크는 정말 판단 착오다. 내가 프랑스 음식에 대한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어서 기대가 너무 컸나 싶기도 하다.  '바베트의 만찬'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꿈꾸는 듯한 느낌으로 차례 차례 펼쳐지는 음식들을 상상으로만 맛보았었다. 그 영화 때문에 프랑스 음식에 대한 동경이 자리잡았나보다. 그러고보니, 바베트도 파리꼬뮨 때문에 가족들을 잃고 덴마크로 도망왔구나.
사실 환상 충족을 위해서라면 미슐렝 스타 레스토랑에 가서 한 500유로 탕진할 정신무장만 하면 된다만, 아직은 50을 넘기지 않은 젊은 나이니까 다음의 경험을 위해 남겨두고, 이번 여행에서는 그런 미친 짓을 하지 않는 것으로 ...

저녁에는 수요일마다 야간개장을 하는 루브르를 가기로 한다. 딸은 이번 주에 끝나는 수업의 마무리를 위해 바쁘다며 숙소로 돌아갔다.
미술품들은 2년전에 와서 많이 봤었고, 제한된 시간 때문에 미술품들을 관람할 만한 충분한 시간도 주어지지 않으니, 오늘의 루브르 방문은 루브르의 역사를 중심으로 보기로 했다.

중국 출신 미국 건축가 I.M. Pei(패율명)에 의해 지어진 피라미드. Pei는 아직도 살아계신데 100세시라고.

필립2세가 축조했다는 당시 파리 보호용 성채의 일부가 루브르지하에 남아있다.

이것이 왕궁으로서의 루브르의 첫 모습이라고 한다. 기존의 성채를 14세기 샤를 5세에 의해 개축되어서 왕궁으로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튀를리 궁전까지 서쪽으로 뻗어나가고 건물의 증축은 나폴레옹 3세에 이르러까지 계속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심취해있던 프랑소와 1세 때 르네상스 식으로 탈바꿈 시킨다. 이후의 이어지는 모든 증축들은 이 르네상스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바르톨로뮤 학살의 지휘자 카트린느 드 메디치가 서쪽에 튀를리 성을 세우고, 영화 "여왕마고"의 남편 앙리4세가 루브르 궁전과 튀를리 궁전을 연결한다. 루이 13세, 루이 14세 때 대대적인 증축을 하였고, 왕궁이 베르사이유로 이전하고 나서는 별다른 증축이 없다가 나폴레옹 3세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데, 파리꼬뮨으로 튀를리 궁전이 꼬뮨세력들에 의해 불타버린다.
튀를리 복원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는데, 결국 해체 결정이 내려지고 만다. 현재 궁정터는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현재의 루브르 모습,

증개축 과정에서 망실되었던 옛 건축물의 흔적들이다.




루브르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관은 작은 편이라 금방 관람을 끝내고 만다.
그래서, 못봤던 또는 봤던 그림들을 천천히 보면서 루브르를 나오기로 한다.

조셉 뒤크루(Joseph Ducreux)라는 화가의 아주 유쾌한 자화상인데 한때 인터넷에서 밈(meme)으로 유명해졌었던 그림이다.



미로의 비너스. 이렇게 만들다가 왜 갑자기 중세의 만화스타일로 수준이 떨어졌는지?
야간이라 사람들이 없으니 이 각도에서 방해받지 않고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나이키.

다비드가 또 그리다만 나폴레옹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마라는 신문지상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을 격정적인 비판으로 몰아세워 글로써 단두대로 보내었는데, 그 중에 한명이 질량보존의 법칙 라브와지에이다. 더군다나 죄수들이 적군에 넘어갈 수 있다며, 예방적 조처로 죄수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선동하였고, 실제로 1500여명의 죄수들이 군중에 의해 학살 당한다. 파리의 9월학살 사건이다
지롱드파에 동조적이었었고, 공포정치는 마라의 펜 끝에서 나온다고 믿었던 25살 아가씨 Charlotte Corday의 순전한 개인 행동에 의해 살해당한다. 길로틴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 아가씨의 바램과는 정반대로 마라의 죽음은 공포정치에 휘발유를 끼얹은 사건이 되어버리고 만다. 곳곳에 마라의 석상이 세워지고, 추앙되고, 신격화 되면서, 혁명의 광기는 한층 더 걷잡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다비드도 마라의 신격화에 동조하면서 이 그림을 그렸다. 다비드는 역사 속의 화가들 중에서 시대가 낳은 가장 철저한 기회주의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암살은 실패한 셈이 되었다. 마라의 시신은 프랑스 국가 최고 영웅을 모시는 팡테온에 들어오게 되었으나,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바로 쫓겨나갔다. 그의 신성시되던 지위도 같이 추락해버렸다.



이 시대에 흑인이 주인공인 누드 그림은 처음인 듯하다, 찾아보니 화가가 신고전주의 여류 화가 Marie-Guillemine Benoist이다.

들라크르와가 그린 쇼팽. 가장 쇼팽을 쇼팽답게 잘 표현한 그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쇼팽의 서정이 묻어나오는 듯. 그런데 액자가 너무 화려해서 그런 느낌을 방해한다.

들라크르와 본인 자화상

들라크르와 작품인데, 모로코의 유대인들의 결혼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이 결혼 장면을 보니 어제 아랍 박물관에서 유대교와 이슬람을 같은 아랍문화권으로 엮었던 설명이 이해가 된다.

오후 9시30분이 되니 슬슬 박물관 가이드들이 여기저기 배치되기 시작하더니 우리를 출구 쪽으로 몰기 시작한다. 퇴로를 차단할 뿐 다른 특별한 동작은 취하지 않는다. 우리는 갈 곳이 없으므로 계속 출구 쪽으로 이동을 할 수 밖에 없다.

쫓겨나가면서 찍은 사진인데, 'D'가 이니셜이다. 프랑스 왕중에 D로 시작하는 왕은 없다. 앙리2세의 정부 Diane을 일컫는 듯하다. 앙리2세의 아버지가 프랑소와 1세인데 앞에서 얘기했듯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폭 빠져있었다. 그래서 앙리2세는 플로렌스의 메디치가에 장가보내기로 한다. 당시만해도 문화적으로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이 앞서있었는지, 이탈리아식 예절 교육 수업이 필요했는데, Diane이란 유부녀를 앙리2세의 가정교사로 붙여줬다. 결국 가정교사와 제자에서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되더니, 아예 루브르 궁으로 불러서 같이 산다. 정부인인 까뜨린느 드 메디치와의 묘한 동거는 앙리2세가 마상창시합으로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쫓겨나는 사람들


마음이 급해진다. 해는 졌는데 아직 저녁 어스름이 남아있다. 완전히 깜깜해지기 전에 푸르른 땅거미를 배경으로 루브르와 피라미드를 찍어보고 싶었다. 출구가 워낙 길어 시간 맞춰 나갈 수 있을지 장담을 못한다.
다행히 그렇게 깜깜하지는 않다.
피라미드와 저녁 어스름

좋은 사진을 찍고 싶지만, 관광객이 너무 많다. 파리에 와서 제일 많은 한국 사람들을 만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중국 사람들보다도 더 많다. 그래서인지 거리에서 기념품을 파는 이들이 "값싸요. 예뻐요" 한국말을 하면서 돌아다닌다.

루이14세

북쪽 facade, 저녁 어스름이 적절하게 깔려있다. 시간을 잘 맞췄다.

꺄후젤의 개선문. 관광객들은 어둠으로 가려져버리고, 드라마틱한 하늘을 배경으로

또 피라미드, 이 블로그의 배경화면

파랗게 이글거리는 하늘과 조화가 잘 이루어진듯

루브르 관람을 마쳤으니 이제는 알렉산더3세 다리를 보러 간다.
바로가기보다는 샹젤리제 거리를 통해서 다리를 향하는게 좋을 것 같다고 하여, 전철을 좀 떨어져서 내렸다. 하지만, 전철을 샹제리제도 아니고 알렉산더 3세 쪽도 아니고 어중간하게 내려서 샹제리제 거리는 걸어보지 못하고, 윈스턴 처칠 에버뉴를 따라 내려온다.
내려오는 길에 멀리 개선문이 보인다.

윈스턴 처칠 에버뉴 상에서 군인 형상의 동상이라 처칠인 줄 알았는데, 프랑스 3공화국 1차세계 대전시의 프랑스 총리 클레망소다.

Grand Palace와 Petit Palace가 윈스턴 처칠 에버뉴 상에 있다.

Grand Palace, 위의 Petit Palace와 함께 1900 파리 엑스포에 맞춰서 건립된 전시장용 건물이었다. 천장을 철제와 유리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밤에 온데다가 facade에 가려서 사진을 찍으니 잘 알 수가 없다.

두 궁전을 지나니, 비로서 처칠경의 동상이 있네

알렉산더3세 다리에 도착했다. 파리의 가장 화려한 다리이고 역시 위의 Grand Palace 처럼 1900 파리엑스포에 맞춰서 건설되었다. 에펠탑도 함께 보인다.
여기 알렉산더3세는 러시아 황제이며 볼세비키 혁명으로 생을 마감한 니콜라이2세의 아버지다.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동맹을 기념하는 다리라고 한다. 니콜라이2세가 착공 행사시 기초석을 놓았다고 한다.

아르누보 식 가로등을 비롯하여 다리를 온갖 장식물들로 꾸며놓았다. 오후에 봤던 장식미술 박물관의 전시물들과 다를 바가 없다.




다리 건너편 엥발리드가 보인다.

다리를 건너서 세느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본다. 젊은이들이 엄청나게 몰려나와 발디딜 틈없이 앉아서 술들을 마시고 있다.

우리도 여기 어디 낑겨서 술한잔 할까 했는데, 저 걸터앉은 자리 바로 밑으로 강이다. 나는 불안해서 못 앉아 있을 듯.

세느강 야경

방금 건너온 알렉산더3세를 뒤로 유람선이 지나가고 있다.

콩코드 광장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전철타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멀리서는 큰 분수가 있는 줄 알았다. 여기까지 다가가보니 거대한 삼성 갤럭시 광고다. 그래 삼성은 이제 글로벌 기업이다. 노트7 폭발 문제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천문학적인 마케팅전을 치루면서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콩코드 광장의 분수

오델리스크

리볼리 거리. 여기서 전철을 타러가는데 시리아 난민이라는 표지를 내걸고 일가족이 거리에 앉아있다. 샌프란시스코에 살면 워낙 사지가 멀쩡한 친구들이 거리로 나서기 때문에, 지나쳐버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일가족이 저렇게 힘들게 난민 생활을 하고 있는데라는 생각에 도와줬어야 하는 것 아닐까란 후회가 너무 늦게 들고 말았다.

아까 강변에서 술먹는 젊은이들을 보고 자극을 받아 우리도 숙소에서 지친 다리를 뻗고 와인을 마신다. 신의 물방울에도 소개되었던 샤스 스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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