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ugust 25, 2017

Paris_2017 파리여행기 - 12 - 팡테옹

다시 라틴 지구를 찾았다. 팡테옹과 뤽상부르 정원을 보기위해서이다.
먼저 점심을 먹는다. 어제는 프랑스 음식을 경험하는데 좀 만족을 못했으니 오늘은 제대로된 프랑스 음식을 먹자고 의기투합하여 와이프가 들고 돌아다니는 DK 여행책에 소개된 곳을 찾아간다. 하지만 점심과 저녁 시간 사이의 휴식시간이다. 더 헤메고 돌아다니지 말고, 사람들 많고 마음에 들어보이는 곳에 들어가서 먹기로 한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이곳 Au Petit Suisse, 1791년부터 영업해왔으니 정말 오래된 식당이다.

뭘 시켜야 할지 몰라, 영화배우처럼 생긴 중년의 웨이터한테 추천을 부탁한다. 오늘의 메뉴를 하나 하나 설명해준다. 그리고, 와인도 골라준다. 나는 거위 뒷다리, 와이프는 가오리찜. 가오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아저씨가 설명하면서 손으로 날개짓을 하길래, 미국 사람들 생선요리로 많이 먹는 Halibut 광어를 말하는 구나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날개짓이 가오리일 줄은 몰랐네. 둘다 훌륭하다. 거위는 특별한 소스 같은 것을 쓴 것 같지 않은데, 바삭하게 즙이 많이 나도록 구워내는 것이 비결인 듯 싶다. 가오리는 한국식으로는 쪄서 간장에 찍어 먹는데, 먹다보면 좀 물린다. 그런데 이 가오리는 무슨 소스인지 그런 물리는 느낌이 없으면서 가오리의 맛을 그대로 즐길 수 있다. 비릴줄 알았는데 와인이랑도 잘 어울린다.

거위 뒷다리

가오리. 감자를 참 뽀송뽀송하게 삶았다.

프랑스 최고의 영웅들만을 모신다는 팡테옹이다. Pantheon, Pan - '모든'을 의미하고, theo - 신을 의미하며 끝에 on으로 끝나는 건 전당의 의미니까, 모든 신들을 모신 신전이란 뜻이라고 한다. 파리의 수호 성인 생 주느비에브 (Saint Genevieve)를 위해 루이15세때 바쳐진 교회를 혁명 이후에 국립묘지로 용도 변경한 건물이다.
루이15세가 병에 걸려 사경에 헤메일 때 만약 다시 건강을 회복하게 된다면, 그 당시 폐허가 되어있던 생 주느비에브 수도원 자리에 파리 수호 성인에 걸맞는 성인에게 바쳐지는 대규모 성당으로 복원하리라고 다짐했는데, 정말 병이 나아, 성당을 건립하게 되었다고들 한다.
그런데, 아들인 루이16세나 할아버지인 14세와 달리 루이15세는 잘생겼었다. 얼굴값 한다고 여성 편력이 매우 심했는데, 이 여성 편력 때문에 인기가 떨어지고, 로마 교황청과도 사이가 안좋아짐에 따라 뭔가 종교계의 환심을 살 프로젝트가 필요했을 것이었다는 설명이 훨씬 현실적인 설득력이 있다.
그러고보니, 역대 프랑스 대통령들의 여성 편력들도 우리처럼 조강지처 모시고 착실하게 살아가는 필부들을 깜짝 깜짝 놀라게 했다. 미테랑의 혼외 딸과 정부가 장례식에 참여한 것이 대표적인 일례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프랑스 정치계는 사생활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척하는 것이 묵인된 관례라고 한다.

18세기 건축물로는 베르사이유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 시대를 대표하는 대규모 건축물임에는 분명하다. 설계자 수플로(Jacques-Germain Soufflot)도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신고전주의 명 건축가로 현세에까지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르네상스도 아니고, 고딕도 아니고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적 전통을 좇아 웅장하고 육중한 열주와 하늘을 찌르는 듯한 돔을 그 주요 특징으로 한다. 이 건물에서의 수플로의 독특한 천재성은 돔에 있다고 한다. 돔은 3중 구조로 되어있고, 안쪽 돔들 꼭대기에는 하늘의 빛을 받아들이는 구멍이 있고,  돔과 돔사이에는 돔을 지지하는 지지벽이 숨겨져있는데, 이 지지벽을 통해 하중을 건물 기둥으로 받아낼 수 있어서, 돔을 지탱할 두꺼운 벽을 지을 필요없었고, 그래서 외벽에 큰 창문을 내어 실내를 환한 빛으로 가득하게 할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이러한 수플로의 구상은 실현되지 못한다. 루이15세가 여자들한테는 기꺼이 썼던 돈을 성당 건립에 충분히 조달하지 못했나보다. 1758년에 시작된 공사는 1780년 수플로가 죽을 때까지 완성되지 못하고, 혁명이 일어나고 1790년에야 완공이 된다. 혁명이후 국립묘지 조성 계획에 따라 이름도 팡테옹으로 바뀌게 되고, 수플로가 계획했던 창문들을 다 벽을 세워서 막아 버린다. 그렇게 어둠침침한 건물로 만들어버렸다. 벽을 세운 이유는 거기다가 벽화를 그려넣기 위해서라고 한다.
사진까지 어둠침침하게 찍혀서 돔의 3중 구조가 잘 안보인다.

신고전주의임을 보여주는 육중한 열주들

전혀 어둠침침하지않다. 수플로는 어느 정도의 화사한 밝음을 원했던 것일까?
입장을 하니 오디오 가이드가 필요하냐고 묻는다. 필요합니다. 영어로 부탁드립니다라고 얘기했더니, 한국어도 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그럴리가요? 진짜예요. 감동적인 순간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사실 성우 2명과 번역가 인건비 정도의 비용에 불과한 것 아닌가? 내가 대충 예산 잡으면 3백만원, 절대 5000 유로는 안넘는다. 인터넷 시대에 각국 언어를 앱으로 다운로드 받게하여 힌두어로도 오디오 가이드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전혀 복잡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한국어로 안내를 들으니 이 언어가 이토록 달콤한 언어인지 예전에 몰랐다.

Le Vengeur 는 분노라는 뜻인데. 전선의 이름이다. 이 전선은 영국과의 전투에서 격침되어 가라앉고 있다. 선원들을 항복보다는 라마르세이유와 삼색기를 흔들며 죽음을 택한다.
이렇게 프랑스 혁명을 찬양하는 조각들이 제일 먼저 우리를 맞이한다.

프랑스 혁명을 되돌리려는 외국군대에 맞서서 거둔 첫 의미있는 승전보 Valmy 전투. 실질적인 전술적 성과는 의문이 많지만, 공화국 혁명을 공고히하고 혁명 세력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승리로 결과지어진 사건이다. 북한의 보천보 전투에 비교하면 너무 프랑스 혁명가들에 대한 모욕인가?

백과사전학파 디드로다. 결국 정보와 지식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이성의 시대를 열어젖힌 사람이다. 말만 떠드는 이론가가 아니라, 그 실질적인 구현체로서 백과전서를 손수 편찬한 실천가이기도 하다. 창조론자가 내각에 들어가는 황당한 21세기 한국의 시대에 18세기 지식인의 깨달음을 다시 환기시켜내야 하다니 통탄할 노릇이다.

아! 루소다.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흐른 피의 많은 부분을 이 낭만주의 철학자가 져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프랑스 혁명은 이렇게 합리와 이성을 축으로 한 계몽주의와 헌신과 희생을 축으로 하는 낭만주의라는 양립하기 힘든 두 개의 바퀴로 굴러갔다.

혁명의 다른 측면에서의 두 축, 무력을 상징하는 군대와 선전선동을 상징하는 웅변가

주느비에브에게 바쳐진 성당을 국립묘지로 바꿨다고 해서 완전히 과거와 단절한 것은 아니었다. 파리 수호 성인 주느비에브를 기르는 벽화들이 창문을 막아버리고 세워진 벽을 장식하고 있다. 주느비에브는 훈족 아틸라가 유럽을 휩쓸고 다닐때 파리 시민들이 패닉에 빠져 도망가자고 우왕좌왕하는 와중에, 사람들을 기도의 힘으로 아틸라를 물리칠 수 있다고 설득하여 모두들 집에 틀어박혀 기도를 하게 하였다고 한다.
아틸라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파리로 안가고 딴 곳으로 가버렸다. 그래서 주느비에브를 신의 힘으로 파리를 지켜낸 성인이 되었다.

프랑스 우파들의 아이콘 잔다르크 역시 팡테옹을 장식하고 있다. 팡테옹은 홍세화씨의 말대로 좌우로 날아가는 새로서 국가를 수립해내는 순탄치만은 않았던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좌와 우가 함께, 그 질곡과 어두운 면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이루어낸 성과는 평가하고 계승하여 다시 새로운 국면을 진전시켜내는 그런 nation building 말이다.

생떽쥐페리. 저렇게 젊은 나이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국민공회와 그 뒤의 성화.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하지는 못하는 모습니다. 예수와 프랑스의 천사, 그리고 왼쪽에 주느비에브, 왼쪽에 무릎 꿇은 이는 잔다르크, 오른쪽 무릎 꿇은 이는 파리를 상징한다.

국민공회 조각상 뒤를 장식하고 있는 벽화 Towards Glory. Édouard Detaille 작. 여기 팡테옹에 있는 대부분의 벽화와 조각등은 전부 1900년 초반에 들여온 것들이다.


몽마르뜨에서 열기구를 타고 파리를 탈출했던 강베타를 여기서 또 만난다. 지하 묘지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처음 만나는 모셔진 영웅들 중의 하나이다. 1920년 제3공화국 50주년을 맞이하여 3공화국 선포를 주창했던 장본인의 심장을 이곳에 모셔왔다. 누가 팡테옹에 모셔지느냐에 따라 좌우의 격렬한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공과 과를 평가해내는 갈등들을 하나 하나 겪으면서 프랑스는 좌우를 아우르는 공화국이 되어갔다.
지금은 대통령이 결정한다고 한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시조 볼테르다. 익살스런 표정이 그의 생전의 신랄한 풍자들과 잘 어울리는 듯하다.



루소와 볼테르는 생전에 그렇게 서로 많이 싸웠다고 한다. 한 사람은 격정적인 낭만주의자고 한 사람은 시니컬한 독설가였으니. 그런데 여기 팡테옹에서 무덤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 루소의 관을 장미가 뚫고 나오고 있다.

지하무덤 중앙 연결 통로는 제법 독특한 곡선미를 보여준다. 또한 지상 못지않은 장엄한 규모라고 할 수 있다.


빅토르위고와 에밀졸라가 같은 방에 나란히 있다. 빅토르 위고 장례식에 수백만명의 인파가 운집했다고 하니 낭만주의 문인이 어떻게 국가 영웅 취급을 받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팡테옹에 모셔진 가장 오래 전 사람으로서의 흑인이 아니었을까? 어린시절 감명깊게 읽었던 몽테크리스토 백작, 삼총사. 그 아들은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로 유명한 춘희의 작가이다. 역시 에밀졸라, 위고와 방을 함께 쓰고 있다. 이곳으로 이장은 2002년 시라크 대통령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장조레스 (Jean Jaurès) 이 사람의 팡테옹 이장을 두고 좌파 우파간 격론이 벌어졌다고 한다. 프랑스 사회주의의 첫 지도자이지만, 혁명적인 공산주의자이기 보다는 사민주의자에 가깝다. 1차세계대전을 반대했던 그는 민족주의자 청년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마라를 죽였던 아가씨의 의도와는 그 암살의 후과가 정반대로 흘렀지만, 이번에는 청년의 의도대로 프랑스는 전쟁에 휘말려든다.

뒤마는 가장 오래전 사람이지만, 팡테옹에 모셔진 흑인으로서는 이 사람이 최초일 것이다.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식민지 총독이 되었으며, 드골과 함께 2차세계대전 중 식민지에서 독일에 맞서서 싸운 공로로 팡테옹에 모셔졌다.

그리고, 마리 퀴리와 남편 피에르가 같이 합장되어있다. 라듐발견이 가장 큰 업적일 것이다. 당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나오기 전이니 방사능 현상, 즉, 스스로 빛을 발하는 원소가 획기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전에 어떤 시계공장 여공들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라듐이 빛을 발하니 시계의 시침에 라듐을 입혀 어둠 속에서 시계를 볼 수 있도록 하는 아이디어로 제품화를 한거다. 여공들은 이유를 모르는 병에 시달리다가 죽어갔다고 한다.
퀴리부인도 70이 되기전에 악성빈혈로 시달리다가 사망을 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방사능에 의한 백혈병이 아니었을까 추정을 한다.

팡테옹은 나름 감동을 주는 장소였다. 안장된 사람들의 면면에서 알 수 있듯이 프랑스를 만들어온 좌와 우의 갈등들이 한 단계 한 단계 진전되어 나가는 현장이었던 것이다. 프랑스가 여기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좌와 우...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서로 인정하면서 한국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도, 그래도 광주의 충격을 고스란히 안아야 했던 우리 세대에게 군부와 반공이 상징이 되어버린 우리나라의 우익들은 용서할 수 없는 벽이되어 존재한다. 그건 우리 세대에겐 어쩔 수 없는 트라우마다.  우리들의 팡테옹은 아마 다음 세대에서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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