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ugust 30, 2017

Paris_2017 파리여행기 - 16 - 빅토르위고, 개선문, 일상으로...

마레지구를 다시 찾아가서 보쥬광장 한켠에 있는 빅토르위고가 가장 오래 살았던 아파트(Maison de Victor Hugo)를 보러가기로 한다.  그전에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프랑스 음식이 아니면서 프랑스에서 특이할 수 있는 베트남 음식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왜냐면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였기 때문에 베트남과의 관계가 오래되었고 또 교류도 더 많았을 것이다. 베트남에 가면 프랑스 음식의 베트남화된 바게트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다. 뭔가 프랑스화된 베트남 음식이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에 베트남 음식점을 검색해본다.
마레지구에서는 "Pho Minh"이란 곳이 검색되어 올라온다.

프랑스에서 맛있는 베트남 요리 중의 하나라는 Nem 이란게 뭘까 궁금했는데 춘권이다. 좀더 튀김이 기름진 느낌. 그래서 와이프는 Nem이 들어간 쌀국수를 늑맘소스에 비벼먹는 걸 시켰다.

난 Pho 국수를 시켰는데, 그렇게 미국 버전과 차이가 없다. 늑맘소스 비린내와 고수나물 향이 짙은 베트남 원조 쌀국수가 그립다.

후식으로는 꽃모양 아이스크림,

위고의 아파트는 보쥬광장 개발시인 1605년에 지어졌다. 이곳 2층 280 평방미터(85평)를 렌트해서 1832년부터 1848년까지 16년간 살았는데, 위고가 살았던 장소들 중에서 제일 오래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고의 집 현관

에스메랄다와 콰지모도. "물한방울을 위한 눈물" 1903년작

Battle of Hernani, 1830년 빅토르위고가 20대였을때, 빅토르 위고의 연극 Hernani 공연장에서 벌어진 낭만주의 문학과 고전주의 문학의 유명한 논쟁 사건. 낭만주의자들이 승리하고 이후 문학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고.

고야의 나폴레옹 군의 스페인 점령에 따른 전쟁을 고발한 그림 Black Paintings의 일부인데, 이 시기인 1800년 초반 빅토르위고의 아버지인 위고 장군이 프랑스 점령군으로 스페인에 주둔하면서 빅토르 위고도 스페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위고는 어린시절 스페인 사람이라고 믿었으며, 프랑스로 돌아와서도 스페인을 항상 동경했다고

위고의 집에서 내려다본 보쥬 광장

노틀담의 곱추의 장면들. 에스메달다가 페뷔스를 만나는 장면에서 주교가 뒤에서 칼로 공격한다..

중국식 거실, 도자기와 중국식 장식 등으로 가득하다.

빅토르 위고가 살았던 당시에 이 거실을 찍어둔 사진들

빅토르 위고는 화가의 기질도 있었다고 한다. 위고의 작품들

위고가 나폴레옹 3세에 격렬히 반대하면서 프랑스에서 쫓겨나 영국령 저지섬에서 망명 생활할 때 지내던 집. 망명지에 부인 뿐 아니라 정부였던 드루에까지 데려갔다고 한다. 물론 좀 떨어져서 살았다고는 하지만 공공연한 1부2처인셈

위고. 1877년 또는 1879년 모습

위고는 서서 집필을 했다고 한다. 요즘 사무실에 책상을 잔뜩 높이 올려서 기립 코딩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집중력을 높이는 한 방편인 듯 싶다.

이 방에 자화상이 또 있다. 아래의 옷장은 큰딸  Léopoldine이 결혼식날 가져갔던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딸은 결혼 직후 세느강에서 보트 사고로 남편과 함께 19의 나이로 숨지고 만다. 위고는 그 후 우울증에 빠져 몇년동안 작품을 쓰지 못했다고.

막내를 제외하고는 모두 위고보다 먼저 세상을 뜬다. 막내 마저도 실어증에 걸려 위고가 죽을 때까지 서로 대화를 못했다고 한다.

정부 드루에 (Juliette Drouet)도 위고보다 2년 일찍 죽는다. 1833년에서 그녀가 죽을 때인 1883년까지 무려 50년 동안 위고 곁을 지켰다고 한다.


1885년 빅토르 위고가 83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숨을 거둔 침대와 임종 시의 방을 그대로 재현하였다.

임종시의 모습. 장례는 국장으로 치루어졌고, 2백만명의 인파가 몰려 애도했다고 한다.

자유, 평등, 박애에 대한 신념이 대단하였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했었던 낭만주의자였었다. 파리꼬뮨과 정부 모두를 신랄하게 비판하였지만, 꼬뮨망명자들의 처지를 동정하는 글을 써서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던 인도주의자. 인간성의 진보에 대해 믿어 의심하지 않았으며,  '20세기에는 전쟁은 죽고, 교수대도 죽고, 증오도 죽고, 국경도 죽고, 도그마도 죽지만, 인간은 살것이다'라고 자신있게 예언했던 낙천주의자이기도 했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 보수적인 생각들이 점점 구체화되어 가지만, 문득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이라는 노래가 갑자기 머리에 떠오르면 마음 속에서의 난데없는 격정에 휩싸이며 눈물이 핑돈다. 물론 뮤지컬이 감정을 극대화 시키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팡틴, 코제트, 마리우스의 아름답고 기가막힌 드라마들이 결국은 이 난데없는 격정의 원천이다.
위고의 집을 나오면서 계단 창으로 들어오는 파리의 오후 빛을 찍어 보았다.

위고의 집을 나와 보쥬 광장의 회랑을 다시 담아본다.

이제 바스티유 광장이다.
프랑스 혁명이 최초로 시작된 곳인데, 이 기둥은 7월의 기둥이라고 샤를10세를 끌어내리고, 루이필립을 선거를 통해 왕으로 세우게한 1830년 7월 혁명을 기념하고 있다.
기둥을 따라 1830년과 1848년 혁명에 희생된 희생자들의 이름이 금으로 새겨져 있고, 꼭대기에 세워진 금박을 입힌 조각은 뒤몽(Dumont)의 자유의 정신(Génie de la Liberté)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한손에는 문명의 횃불을 다른 한손에는 끊어진 사슬 조각을 들고 있다.

정명훈이 개원 직후 초대 지휘자로 있었던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이다.
그동안 보아왔던 미테랑 시기의 프로젝트들의 결과물들은 대부분 경탄, 최소한 멋있네 정도의 칭찬들을 해왔었는데, 이 바스티유 오페라 건물은 어딘지 우리나라 지방자치 단체가 지어대고 있는 류의 건축물 같다는 느낌으로 별 감흥이 없다. 특히 가르니에 오페라 하우스와 비교해보거나, 같은 현대식 건물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을 비교해보면 건축작품을 잘못 골랐던 것이 아닐까란 까칠한 생각을 하게 된다.
우루과이 출신의 무명의 건축가 Carlos Ott가 최종 선정되었는데, 심사위원이 그의 제출작을 미국 건축가인 리차드 마이어로 착각을 했었다는 일화가 있긴하다.
프랑스의 좌우 정치 대결에 따라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 자리가 왔다갔다 했다. 원래는 다니엘 바렌보임이 취임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좌파 이사진이 바렌보임을 우파들의 지원을 받는다고 해임해버렸다. 이에 동시대 음악인들이 격분하여 항의와 보이콧을 하는 바람에, 비교적 젊고 무명인 정명훈한테 운좋은 기회가 돌아간 셈이었다.
그런데, 1994년 정권이 좌우가 바뀌자, 이번엔 우파 쪽에서 6년이나 계약 기간이 남아있던 정명훈을 해임해버렸다. 프랑스 정치의 성숙도는 전혀 부러워할 게 아닌 듯 싶다.

facade. 이 건물의 건축 디자인 외에도 공사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저 facade 장식돌들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면서 전체적으로 안전망을 씌워 놓았는데, 이를 보고 당시 음악 감독이 구멍난 콘돔 같다고 했다고 한다,
이후에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해야 했다고.

오페라 극장 오른쪽의 이 빌딩이 더 눈길을 끄는 듯

오른쪽 면

시테섬 위고 집을 보느라 지친 다리를 쉴겸, 여기 Cafe Francois에 들어가서 커피한 잔 하기로 한다.

커피를 시키니 이렇게 작은 과자를 준다.


커피를 다 마시고 여기 혁명이 실제로 일어난 곳이 어디냐고 웨이터한테 물어보니까, 당신이 커피를 마신 바로 여기라고 카페에 붙어있는 동판을 가리킨다.
예상치못한 행운이다. 바스티유 성채가 걸쳐있던 장소라고 한다.

우리 딸의 호출이 왔다. 개선문을 보고 싶다고 개선문에서 만나자고 한다.
개선문도 옛날에는 그냥 올라갔었는데, 이제는 아주 긴 줄을 서야 한다.

웅장하고도 화려한 개선문 (Arc de Triomphe)
나폴레옹에 의해 그의 최고의 승전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승리와 함께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에 희생된 이들을 기념하기 위해 건설이 시작되었다. 쟝 샬그랭(Jean Chalgrin) 이란 건축가에 의해 1806년에 디자인되어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왕정복고 기간 중에 공사가 중단되어버려 1836년에야 완공되었으니 나폴레옹은 살아 생전 완공을 보지 못했다.
지하에는 1차세계대전의 무명용사들의 유해가 묻혀있다.

일단 사람들에 휩쓸려 먼저 개선문 안쪽을 통해 나선형 계단을 꽤 높이 올라간다. 개선문 안에는 박물관과 기념품 상점이 마련되어 있다.
1차세계대전 기념관

작지만 외부로 통하는 창도 있다.

유명한 "라 마르세에즈" 또는 "1792년 의용군의 출발" 부조 조각의 자유를 상징하는 여인 얼굴. François Rude의 1836년작으로 와이프가 저 표정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고 한다.



전 세계 개선문의 위치를 지도로 표시하여 클릭하면 설명을 보여주는데, 우리나라에 점이 있다. 흠 독립문을 개선문으로 취급해주나 싶어서 클릭했더니, 평양의 개선문이다. 아 이런 코미디가 있나. 그런데 평양 개선문이 파리의 개선문보다 더 크다고.

지금은 샤를드골 광장이라고 불리지만, 원래 이 길들의 중심을 Place de l'Étoile 이라고 불렀는데, Étoile 이 별이란 뜻이란다. 여기서 사방 팔방 길들이 뻗어나가는 형상이 별을 닮았다고.

저기 라데팡스 지역의 신개선문이 멀리 마주보인다.

북쪽을 사진에 담았으니 이제 남쪽으로

몽파르나스 타워, 앵발리드

팡테온과 국립도서관이 보인다.



파노라마로 찍으니 별모양 길들이 펼쳐져 버린다.



이제 꼭대기에서 찍을 만큼 찍었으니 계단을 따라 다시 내려간다.

무명용사 유해가 안치된 것을 기념하는 꺼지지 않는 불꽃

"1810년의 승리" Jean-Pierre Cortot의 작품으로 나폴레옹이 1809년 대승을 거둔 바그람 전투의 결과로 체결된 쇤부른 조약을 기념하기위해 제작된 부조상이다. 승리의 여신이 나폴레옹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고 있다.

위에서 설명한 '1792년 의용군의 출발' 또는 'La Marseillaise' . 1차세계대전 당시 지원병 모집과 전쟁국채 판매독려에 활용되었다고 한다.

저 여인은 자유를 상징한다고 하는데,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라'라고 외치니 불편한 자유이다.

그외에도 많은 조각과 부조로 장식되어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주요한 순간들을 기록하고 있다고

이제 파리 관광지 여행은 끝났다.
숙소가 있는 샤틀레 지역으로 돌아오니, 미쳐 몰랐는데, 몽마르뜨의 아베스 역에서 만났던 그 아르누보 지하철 역이 우리 숙소 바로 앞인 여기에도 있다. 찾아보니 이곳과 아베스 역 포함해서 모두 3곳이 남아있다고 한다.

우리 숙소 바로 코앞에 있으면서 못가봤던 Fontaine des Innocents. 앙리2세 시기였던 1549년에 세워진 르네상스식 기념물이다. 베르사이유 궁전 최고 건축 책임을 맡았던 Pierre Lescot 의 디자인이다. 원래는 이곳에 있던 대규모 공원묘지의 벽을 등지고 있었는데, 공원묘지가 위생문제로 옮겨지고 시 외곽으로 또 카타콤으로 옮겨지고 나서, 공원묘지의 자리는 시장이 되었고, 이 분수도 철거될 위기에 처해있었는데, Quatremère de Quincy라는 작가에 "프랑스 조각의 대표적인 걸작"이란 호소에 의해 살아남아 당시 시장의 광장 한가운데인 이곳에 설치되게된다.

역시 숙소에서 코앞에 있는 레알 (Les Halles)역인데 대형 쇼핑몰이 있다. 이 건축물 역시 유명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원래 1850년대에  Victor Baltard에 의해 유리와 철제로 지어졌던 시장 건물이 1970년 해체되었다가, 2010년 Patrick Berger과 Jacques Anziutti에 의해 현대적 건축물로 재디자인되어 "Forum des Halles" 란 이름의 거대 쇼핑몰과 전철역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저녁은 의외로 일본라멘. 제법 원조의 맛이 난다.

이제 파리에서의 마지막 잠을 자고 일어나서 지난 일주일 동안 우리의 발이 되어준 Navigo카드의 마지막 행선지 샤를 드 골 공항으로 향한다. 와이프는 우리 딸과 한국여행을 계속하기로 했다. 나는 직장을 나가야 하니 집으로 돌아와야 하고. 와이프와는 잠시 작별이다.


샤를드골 공항 내에서의 보행자 이동 통로는 이렇게 또 곡선미를 강조해놓았다. 어디든 멋스러움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되는 전통이다.

비행기 차창밖 농촌 풍경을 담아본다. 프랑스는 산지가 거의 없고, 대부분이 이런 비옥한 농토이다. 이렇게 생산이 바쳐주니 그 먼 로마시절부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파리에 모여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다시 아이슬란드로 돌아와서 샌프란시스코 가는 비행기로 환승해야 한다.
옛날 한국의 지방 공항처럼 버스타고 가서 계단으로 올라가서 탐승해야한다.

이 맛없는 아이슬랜드 맥주와 샌드위치에 얼마나 거금을 투자했는지. 각각 8불 10불.

기내 방송중에 그린란드를 지나고 있다는 안내를 받고 젭싸게 창가로 가서 자리를 차지하고 계신 분의 양해를 구하고 셔터를 눌러서 생전 처음 그린란드라는 곳을 사진에 담아본다.

그린란드를 사진에 담는 것으로 8박9일의 파리 여행이 마무리되었다.
여러가지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WOW 항공편이 시간 편성에 있어서는 정말 마음에 든다. 금요일 업무를 마치고 퇴근하고서 출발 준비를 한 다음, 밤10시30분 비행기를 타고 유럽을 일주일 꽉채워 여행하고서 일요일 비행기를 타고 일요일 밤에 도착해서 그 다음날 월요일 바로 출근을 할 수 있다. 1년에 4주 정도 휴가를 낼 수 있으니 이렇게 최대 4번 갔다 올 수 있는 셈이다.

이제 집에가서 잠을 청하면 파리 시간으로 밤을 세운 후 아침부터 잠을 자기 시작하는 셈이다. 그렇게 한숨자고 일어나서 일상으로 돌아간다.
샤를 드골 공항으로 가는 RER 전철에서 누군가 아코디언으로 에디트 피아프의 장미빛 인생을 연주해줬다. 내 옆에 앉아있던 친구는 2유로 정도를 보태는 것 같았다.
일상으로 귀환해야 하는 나는 아코디언 연주를 들으면서 속으로 파리는 너무 낭만적인게 문제라는 생각을 불현듯 한다. 파리의 지박령은 너무 철이 없는 것 아닐까, 그래서 오래 사나, 그래서 그렇게 아름답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과 함께, 이번에 일주일이나 투자했는데도 시간이 부족해서 놓치고 못본 곳들, 또는 공부가 제대로 안되어서 제대로 못본 곳들이 많구나라는 생각을 해본다.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다는 여유로 아쉬움을 달래본다. 그런데 불어를 정말 이 나이에 공부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