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ugust 27, 2017

Paris_2017 파리여행기 - 15 - 시테섬

어느덧 토요일이다. 이제 온전히 여행할 수 있는 날은 오늘 하루 남았다. 나는 이제 내일 일요일 오전 비행기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야 한다. 와이프하고 딸은 약 3주간 한국 여행을 계속하기로 했으니 내일은 가족이 잠시 헤어지는 날이기도 하다.
오늘은 딸이 지난 5주 동안 묵었던 숙소에서 나와야 하니, 짐을 우리가 묵고 있는 airbnb 숙소로 옮겨와서 우리랑 지내야 한다.  아침에는 딸이 짐을 빼는 것을 도와주기로 한다.
Vaugirard 라는 동네에 있는 학생들 숙소.

짐을 가져다 놓고, 우리는 시테섬으로 걸어내려간다.
내려가면서 Hôtel de Ville 사진을 한장 더 찍는다.

노틀담 성당 앞에 도착했다.
노틀담 앞에는 사람들이 또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몇주전에 발생했던 테러에 아랑곳하지 않고 입장을 위해 끝이 안보이는 줄을 늘어뜨려놓고 있다. 역시 테러에 대한 경계로 경찰들이 많이 눈에 띄는데 특이하게도 자전거를 이용하고 있다.

노틀담에 왔으니 정문을 사진에 담아본다.

엽기적 포즈의 파리 최초의 순교자 생드니

아래는 천국과 지옥의 비교인가? 이 Tympanum의 제목이 최후의 심판이니, 심판의 날에 벌어질 일들을 묘사한 듯 싶다. 천국의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행복해보이지는 않는다. 너무 정적이고 무표정하지만, 지옥에는 많은 활동들이 전개되고 있고 익살스러운 다양한 표정들이 있어서 더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조각들을 어제 기념물 박물관에서 봤던 중세 조각들과 비교해보면, 너무 솜씨가 차이가 많이 난다고 생각을 했는데, 역시 1845년부터 진행된 25년간의 복원 공사 과정에서 원본을 복제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아마 원본은 혁명등의 정치 격변을 겪으면서 많이 훼손되었을 것이다.
원본은 아마 중세박물관에 있었을텐데 내가 놓쳤었나보다. 이 지옥도 중에서 19세기 복원자의 불온한 사상이 드러나는 것 같다고 하는건 내가 너무 넘겨짚은건가? 오른쪽에서 두번째 열을 보면 부자, 비숍 그리고 왕이 뚱보 악마에 깔려서 고통받고 있다. 복원자는 Eugène Viollet-le-Duc 라는 사람으로 당시 중세교회 복원의 전문가였는데 원본과 너무 판이하게 복원하는 경향 때문에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 아이디어를 넣었을 수도.

대천사 미카엘이 영혼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다. 악마는 자기쪽으로 끌어내리는 꼼수를 피우고 있고, 저울에 올라있는 사람의 표정은 초조 불안하고 불쌍해보인다.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면서 사슬에 묶여 지옥으로 끌려가는 영혼들 중에는 역시 왕관을 쓴 사람이 보인다.
원본을 보고 싶다.

이 모자를 삐딱하게 푹 눌러쓴 불량스러워 보이는 소녀는 누구일까? 유대교를 상징하는 Synagoga라고 한다. Synagoga에 대별되는 상징은 Ecclesia이고 교회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래서 중세 성당을 장식할 때 이 두 상징의 소녀상들을 최대한 대비시켜서 세운다고 한다. 한명은 성스럽고 밝은 은총과 축복의 모습으로 십자가를 들고 있고, 또 다른 한명은 눈이 가리워진채 어둡고 절망적이고 비탄의 모습으로 토라나 계명이 세겨진 판들을 들고 있다.
왜 이렇게 유대교를 경계했었는지 당시에 유대교에 그렇게 라이벌의식이 강했었나 궁금해진다.

샤를마뉴 대제 동상이 길게길게 늘어선 관광객들의 줄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너무 무섭게 형상화를 해서 카리비언해적에 나오는 크라켄의 느낌이 난다.

모든 프랑스 고속도로의 0km 출발점 표지석 (Point Zéro des Routes de France)으로 노트르담 앞 광장 어딘가에 있다.



처음 노틀담에 왔을때가 2000년 9월이었다. 그때는 정말 줄도 굉장히 짧았고, 종이 있는 첨탑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한산해서 곧바로 올라가서 온갖 가고일을 실컷 봤었다. 그때는 또 한참 담배를 피울때라, 숨가쁘게 올라왔으니 담배 생각이 간절하여, 가고일 옆에서 목을 빼고 담배를 피우기까지 했었다. 물론 가이드한테 들켜서 혼났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글로벌 규범에 대한 아무런 감이 없는 철없는 어글리 코리언이었네. 어쨋든 그렇게 여유가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사람들이 갑자기 정말 미친듯이 늘어났을까.

노틀담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건 포기하고, "Archeological Crypt of the Parvis of Notre-Dame(노틀담 광장의 고고학적인 지하공간)"이라는 긴 이름의 박물관으로 간다. 노틀담 밑으로 지하주차장을 만들기위한 공사를 1965년부터 1972년 동안에 진행했나보다. 그때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로마시대 건축물 기초 부터해서 19세기에까지 시테섬에 있었던 건축물의 흔적들과 목없는 석상들과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석상 머리들 상당수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들 목없는 석상과 머리들은 중세박물관에 보내지고, 건축물들의 흔적들을 이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로마시대의 파리이다. 시테 섬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더 많은 도시가 발달해있고, 북쪽으로 지금 샤틀레 레알까지 시가지가 있었다. 로마황제 "배교자 줄리안(Julian the Apostate)"는 라틴지구에 있는 목욕탕에서 즉위식을 올렸었고, 파리에 근거지를 두었으니, 이미 4세기인 이 시대부터 유럽의 주요 도시였었다.

로마시대의 방어벽의 흔적이다.

로마시대 방어벽임을 증명하는 벽돌

로마시대 조각상. 그리스 로마 시대가 다 조각을 잘했던 것은 아니군



야만인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로마로 문명화된 파리를 지키는 성벽

로마시대의 파리 모습

로마시대 목욕탕

박물관 설명에 따르면 옛날에는 이 지점까지 물이 들어왔다고 하고, 여기는 항구였다고 한다. 그래서 루테리아 인들의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다고. 박물관은 그 당시의 활기찬 모습을 영상과 음향으로 재현해놓고 있다.

4세기에 저런 기중기를 썼다고? 정약용의 수원성 축조 때 기중기를 썼다고 배웠는데, 어떻게 된거지 혼란스럽네.
Left bank 그러니까 세느강 남쪽에 버려진 건축물들의 자재를 이용해서 시테섬을 보호하는 방벽을 쌓았다고 한다. 돌에 세겨진 글자들을 통해서 원래 돌의 출처를 추적할 수 있다고

1550년의 시테섬. 퐁네프 이전의  다리들 위에는 저렇게 집들을 지어 놓았다.

1740년의 Delagrive라는 지도 제작자의 파리 재개발 계획도. 18세기의 파리 모습을 알 수가 있다.

19세기 노트르담 복원 공사 현장 모습

이제 이 지하공간을 나와서 유태인 추념관으로 이동한다.

퐁셍미셀 다리에 있는 기념동판. 적혀있는 글귀는 다음과 같다.
"a la memoire des nombreux Algeriens tues lors de la sanglante repression de la manifestation pacifique du 17 octobre 1961"
변역을 해보면,
"1961년 10월17일에 있었던 평화적 시위에 대한 폭력적인 진압으로 죽임을 당한 알제리인들을 애도하며"
이 사건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 잘 없을 것이다. 나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알제리 독립을 요구하는 식민지에서의 요구에 대해 프랑스 정부는 매우 폭력적으로 대응을 하였다. 알제리 본국인들은 파리에 있는 알제리인들은 도대체 뭐하고 있냐고 프랑스에서도 독립을 지원하기 위해 일어서라고 호소하기 시작한다. 이에 호응하여 파리의 알제리인들은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는 시위를 1961년 10월에 가지게 된다. 약 30,000명 정도가 모였고, 철저한 평화시위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알제리해방전선의 테러로 인한 경찰의 사망사건으로 약이 오를대로 오른 경찰들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100명에서 3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게다가 이 사망자들의 시신을 세느강에 버려, 파리시민들은 세느강에 둥둥 떠다니는 시신을보고 질겁을하고 경악하게 된다.
당시 파리 경찰을 책임지고 있던 사람은 모리스 파퐁이란 사람이었는데, 사망자가 나와도 상관없으니 폭력 진압을 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사실이 현재 널리 인정이 되고 있다. 이 사람은 사실 비시정권의 경찰 간부이었기에 부역자였는데, 독일의 패배가 점점 명백해지던 1944년에 갑자기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면서 살아남는다.
후일 드골파가 되어 파리경찰을 책임지게 되면서 이런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파퐁은 이 사건으로는 기소를 당하지 않고 1981년 비시정권하에서 유태인들을 죽음의 캠프로의 이송에 협력했던 점이 결국 드러나 재판을 받기 시작하게 되었고, 무려 17년간의 재판 기간 끝에 1998년 유죄 선고를 받아 20년형을 언도받지만 건강을 핑계로 끈질긴 석방 노력을 기울여, 수감생활 겨우 4년만인 2002년에 석방되어 2007년 96살까지 살다 죽는다. 정말 전두환, 피노체트 같은 놈이다. 악마는 오래 산다.
프랑스 정부는 이 학살사건이 있은지 37년동안이나 사망자 발생에 대해 부인을 하다가 결국 1998년에야 사망자의 존재를 30명선에서 인정한다. 이 기간 동안 사회주의자 대통령 미테랑이 14년이나 장기집권했었는데도 말이다.
이 동판은 2001년 당시 사회주의자 파리시장 델라노(Bertrand Delanoë)에 의해 설치되었다.

다음은 시테섬에 있는 "Memorial des Martyrs de la Deportation" 이라는 유태인 강제 이송 추념관으로 간다.
며칠전에 보았던 2010년 영화 La Rafle (The Roundup)은 프랑스에서 자행되었던 유태인의 새벽 기습 검거와 벨로드롬에의 집단유치, 그리고 죽음의 캠프로의 강제 이송을 다루었다.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와서 눈물을 흘리며 영화를 볼 수 밖에 없었다. 그 영화를 보면서 가졌던 슬픔과 분노를 그대로 가지고서 추념관 안에 들어선다.

추념관으로 내려간다.

내려서자 갑자기 세상이 확 바뀌어버렸다. 조금전까지 나를 둘러쌌던 관광객들의 즐거운 표정과 바삐 돌아가는 파리 일상의 번잡스러움들, 세느강과 세느강을 장식하고 있던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모두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하얀벽과 가슴을 찌르는 슬픔과 절규를 표현하는 듯한가 금속 조형물만을 마주하게 된다.
헤아릴 수 없는 슬픔과 어이없는 죽음을 기리는 엄숙함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구나라고 나름 감탄한다.
이 추념관은 드골의 지시로 건축가 Georges-Henri Pingusson의 설계에 의해 1962년 조성되었다.

세느강을 볼 수 있는 창을 내어 놓았다. 희생자들의 혼령이 흐르는 곳으로의 연결인 듯하다

전체적인 디자인은 매우 절제된 미니멀리즘에 예리한 폰트와 예리한 상징물로 희생자들의 절규를 나타내었다.

나찌가 점령한 유럽 전역에 있던 캠프들의 위치를 표현했는데, 큰 폰트와 더 큰 붉은 점은 학살이 자행되었던 죽음의 캠프이다.

외부로 좁게 연결된 통로는 비극의 장소로 안내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저렇게 좁은 통로을 통해 지하무덤으로 들어간다.

벽 양옆으로 20만개의 크리스탈이 장식되어 있다. 프랑스에서의 희생자 숫자다. 끝의 불빛은 희생자의 실제 유골함이 안치되어있다.

Paris_2017 파리여행기 - 14 - 건축박물관, 방돔 광장, 팔레루아얄

라틴지구에 3일째 방문한다. 오늘은 어제 점심 영업 시간을 놓쳐서 못갔던 DK 여행 책자의 추천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 기 때문에 다시 온거다. La Bastide Odeon. 평점도 높고 이런 저런 사이트에서 추천 마크를 많이 받아 놓았다.

맛을 어떨지. 제일 간단한 prix fixe 메뉴가 있다. 전체와 본요리, 또는 본요리와 디저트. 미국에서는 본요리를 Entree라고 하는데 프랑스에서는 전체를 Entree라고 한다. 그래서 전체가 있는 세트메뉴와 디저트가 있는 세트메뉴 각각 하나씩 시켜서 먹기로 한다. 그러면 코스 3개를 다 먹게 되는 셈이네. 바베트 만찬에서 나왔던 코스는 엄청나게 길었었는데. 프랑스 정찬의 순서는 오도브뢰와 아페르티프용 와인에서 시작하고, 전채와 샴페인, 본요리로 생선과 화이트 와인, 또 본요리로 육류와 와인, 디저트 파트로 넘어와서 치즈와 또 와인, 그런 다음 디저트, 과일과 디저트 와인, 커피, 마지막으로 꼬냑. 배가 부른 건 둘째치고, 저렇게 술을 많이 먹나 싶다.
전체는 홍합요리. 홍합과 아보카도, 그리고 토마토. 조그맣고 찬 홍합이 쫄깃쫄깃하면서 독특한 맛이 있다.

본 요리로 와이프는 리조또에 거위 껍질을 얹은 것

나는 어떤 생선인지는 모르겠는데, 피쉬케익이다. 파 뭉치를 올려놓았네. 샐러드는 아르굴라 맛이 너무 강하다.

그리고 디저트. 저 과일은 뭔지 모르겠다. 안에 작은 씨앗들이 있다.
이렇게 와인이랑 먹은 가격이 미국돈으로 57.43불 계산되었다. 미국에서는 세금과 팁을 생각해야 하니까, 20불 조금 넘는 식사를 2명이서 한셈이다. 그렇게 따져보니 이 프랑스 레스토랑이 오히려 미국 식당들보다 저렴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국 실리콘 밸리 지역에서는 순두부 한그릇에 15불이니.

이 동네에 온김에 어제 못봤던 메디치 분수를 보러 다시 뤽상부르 공원을 들른다.
메디치 분수도 마리 드 메디치가 이탈리아 Grotto 양식으로 만들어 그녀의 어린시절에 대한 향수를 달래게 했단다.

부르봉가와 메디치가의 엠블럼을 같이 조각해놓았다. 프랑스 혁명 때 군중들이 갈아버린 것을 후일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분수는 Tommaso Francini라는 프랑스로 귀화한 이탈리아인의 작품이다. Left bank라고 부르는 세느강 남쪽 지역은 물이 없어서 분수 공사가 힘들었다고 한다. 분수의 조각 상들은 처음에는 없었는데 지금의 폴리페우스 조각상은 오스만(Hausmann)의 나폴레옹 3세와 함께 했던 파리 대개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분수를 새단장하면서 Gisors라는 사람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폴리페우스가 아시스와 갈라테아(아래의 흰색 조각)가 사랑을 나누고 있는 장면을 목도하고 완전 광분하고 있는 모습이다. 질투에 눈이 멀어 아시스를 돌로 찍어 죽인다.
위에서 물을 따르고 있는 요정들은 각각 론강과 세느강을 상징한다고 하고, 양쪽으로 서있는 조각상들은 목신(faun)과 여자 사냥꾼이고, 그위의 마스크는 각각 희극과 비극을 상징한다고.

이 분수 뒤로 돌아가면 분수가 Fountain of Léda라고 하나 더 있다. 숨겨진 분수라고들 하는데, 오스만의 심시티로 없어질 위기에 있던 이 분수를 여기로 옮겨와서 메디치 분수 뒤에다가 붙여놓았다. 그리스 신화 이야기 중 레다와 제우스로 변한 백조를 세겨 놓았다.

온김에 뤽상부르 정원 모습 한번 더 찍어 본다.

다음의 목적지는 Cité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건축과 기념 조각물의 박물관이다.
위치해 있는 건물은 샤이어 궁의 일부로 웬지 나찌 선전 영화에 등장하던 건물들과 유사한 양식의 건물이다. 구글로 찾아보니 역시 내 느낌대로 그 시절인 1937년에 지어진 건물로, 기존에 있는 트로카데로 궁전을 허물고 1937년 파리 엑스포에 맞추어 지어진 건물이다.
구글에서 찾아보니 신고전주의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당시 굉장히 유행했던 아르데코에 훨씬 가깝다. 1930년대에 지어진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도 아르데코 양식으로 분류된다. 역시 동시대의 나찌식의 웅장한 건물들이 모두 아르데코였었다.

박물관에 입장을 해서 오디오 가이드를 신청한다. 그랬더니 갤럭시 폰을 준다. 다른 앱은 열 수가 없고, 오디오 가이드 앱만 열 수 있다. 그런데 오디오 가이드를 통해 설명을 해주는 전시물들은 제한적이다. 사실 이 많은 전시물들의 설명을 다 들으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니 오디오 가이드로는 적당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각 전시물에 있는 짧은 설명들은 모두 프랑스어로 되어있다. 그러니 오디오 가이드에서 설명해주지 않는 많은 전시물은은 이런게 있구나하고 그냥 지나쳐야 하다니 좀 이상하다.  아마 이런 불만들을 많이 들었던지 뭔가 해결책이라고 제시해놓은 것이 각 전시실 입구에 큰 코팅된 설명문들을 각 나라 언어별로 비치해놓았다. 중국말이 있다. 그럼 한국말도 있겠지 하고 뒤져봤는데 기대와 달리 없다. 더군다나 일본어도 없다. 중국의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오는 여행객들을 무시할 수 없지.
그런데,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면서, 저 커다란 판넬을 각 전시물에 번호 찾아서 맞춰보고, 사진까지 찍으면서 여기를 돌아다닌다는 것은 나의 게으른 천성이 허락하지 않는 너무나 번잡스러운 일이다.  그냥 오디오 가이드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전시만 쫓기로 했다. 와이프는 그게 용납이 안된다. 판넬을 기어이 들고 전시물 하나하나 확인해본다.
오디오 가이드 앱을 선택하면 언어 설정을 할 수 있는데 일본어는 있는데, 한국어는 뭐 예상대로 당연히 없다. 그런데, 중국어도 없다. 언어지원의 기준이 무척이나 혼란스럽다.
영어로는 그럭 저럭 안내를 알아들을 수는 있는데 머리속에서 휘발성이 강하니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문제가 있다. 따로 구글을 해서 찾아봐야 안내를 들었던 기억을 재조립할 수 있다.

박물관의 구조는 1층에 기념조각물 전시실이 있고, 2층에 건축박물관이 있다.
1층 기념조각물 박물관은 중세의 기념물부터 시작한다. 이 전시실은 2007년 renovation을 하기는 했지만 1879년부터 전시를 해왔으니, 사실 유래가 상당히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 있는 전시물들은 다 복제품이다. 복제는 실제 원본을 왁스로 떠서 거기다가 석고 등을 부어 복제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여기 첫 전시품인 Abbey of Sainte-Trinité, Caen 의 정문을 본뜬 복제품인데 11세기의 기념물이라고 한다. 아랍의 영향을 받았는지 아라베스크 느낌이 나는 식물들의 반복적 도안들이 눈에 띈다. 그런데 성서 이야기들을 표현한 인물 묘사는 루브르에서 봤던 그리스 로마 조각에 비해서 확실히 퇴보해있다.

Beaulieu-sur-Dordogne라는 동네에 있는 Saint-Pierre Abbey church의 정문 장식. 이런 반원형의 정문 장식을 Tympanum이라고 한다. 예수의 부활과 승리를 묘사했다고 하는데 예수가 마오리족 전사 처럼 눈을 부릅뜬 모습이 우리가 아는 인자하고 슬픈 사슴 눈의 예수하고는 달라서 흥미롭다. 중세는 정말 재미있고 끔찍한 시대였던것 같다.

Carennac 란 동네에 있는 11세기 St Peter's church의 또 Tympanum
역시 재미있는 인상의 예수님이다. 지금의 예수의 선한 이미지는 르네상스 때 라파엘 등등을 통해서 형성된 듯. 아마도 각 시대마다 예수로 표현되는 모델이되어야 할 남성 상이 있었는데, 중세시대는 뭔가 마초 또는 산적 분위기의 남성 상이 지고의 지위에 있었던 듯.

Church of Saint-Pierre d'Aulnay, 역시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게 분명하다. 맨아래 문양은 누가봐도 아라베스크다. 그런데 이 사람들 술먹고 춤추는 모습들을 신성한 성당에 세겨놓아도 되는건가?


정말 중세의 조각들은 재미있다. 이건 어느 교회에서 본뜬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예수가 댄스하는 모습이라니.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형적인 조각에는 늘 악마가 등장한다고 한다. Autun 이란 동네의Cathedral of Saint Lazarus of Autun 에 있는 예수의 2번째 유혹 조각. 저 괴물은 나한테는 마야 유적이라고 해도 괜찮을 듯한 원시적 느낌이 강렬하다. 피카소가 멀리 아프리카 민속 미술에서 찾을 것 없이 중세만 유심히 봤어도 얼마든지 인간 본연의 동물적 원시성을 충분히 찾을 수 있었네. 역시 11세기이다.

노틀담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Rouen cathedral 의 세례자 요한을 그려넣은 정문 Tympanum이다. 살로메가 춤을 춰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자른 구약얘기를 묘사 해놓았다. 살로메가 물구나무 서기 춤을 췄었네. b-boy였나. 이제 시대가 좀 진전되어 13세기. 11세기의 야수성들이 좀 약해졌다.

Laon 성당의 모형이다. 노틀담 성당만큼 중요한 고딕 문화재라고 한다. 12세기와 13세기 사이에 초기 고딕 양식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노틀담과 자주 비교가 되는 성당이다.
실제로 보지는 못했지만, 내 느낌으로는 노틀담보다 훨씬 장식적이고 화려하다. 장미창의 크기는 노틀담보다 작은 2번째로 큰 고딕식 창이지만, 내부 실내가 하얀 석재로 되어 있어서 훨씬 화사하다고 한다.

으스스한 Assasin 분위기의 중세의 수도사이다.

통곡하는 수도사들. Dijon 지방의 Charterhouse of the Holy Trinity of Champmol라는 수도원에 있는 조각상들인데 제목은 "John the Fearless의 무덤에서 울부짖다"이다. 15세기이다.

 Limoges의 Saint-Etienne 성당의 건축물인데 구체적인 내용은 찾을 수가 없다. 점점 그리스 로마 조각 실력을 회복할 뿐 아니라 더 세련되어지고 있다. 중세의 거칠고 투박한 재미는 이제 찾을 수 없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오디오 가이드의 내용은 프랑스 혁명으로 많이 훼손이 되었다는 거다. 왜 이런 멋진 발코니가 분노의 대상이 되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기를 안고있는 엄마의 목과 그 아기의 목까지 자른 건 충격이다.

셀카를 찍는 해골? 16세기 조각가 Ligier Richier의 Transi de René de Chalon란 작품인데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스마트폰이 아니라 자기 심장이다. 25살에 죽은 오랑쥬의 왕자 René de Chalon 의 와이프가 조각가에게 자기의 심장을 바라보며 살점이 썩어나가는 모습으로 남편의 죽음을 기려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모든 육신은 죽어서 먼지가 될 뿐이라는 생각이 르네상스의 정신이었다고 한다. 왕자의 실제 심장을 말려서 유물함에 넣은 곽이 저 손에 들려있었다고 하는데, 프랑스 혁명기에 도난 당했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이 저지른 여러가지 약탈과 파괴 행위는 혁명 세력의 특별한 도덕적 결함보다는 강력한 지도력 부재에 따른 무정부 상태가 가장 큰 문제였을 것이다.

스타벅스의 사이렌도 프랑스 유물이었나?

파리의 Hotel of Rohan에 있는 조각이다. 아폴로의 말들이란 작품이다. Robert Le Lorrain 에 의한 1738년 작

관람을 하는데 계속 밖으로 보이는 에펠탑에 시선이 뺏긴다. 샤이어 궁은 사실 에펠탑을 사진 프레임에 인물과 함께 적절한 비율로 담을 수 있는 위치에 있어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특히 히틀러가 파리 점령 후 에펠탐을 배경으로 찍어 2차세계대전의 상징이 되었던 사진이 바로 샤이어 궁에서 촬영된 것이었다.

이제 위층에 있는 건축박물관으로 이동한다.

1950년대의 프로젝트로 마르세이유에 지어졌었고, Cité radieuse (Radiant City)라고 불렸던 아파트를 전시해놓았다. Le Corbusier라는 스위스 출신 프랑스 건축가에 의해 설계되었다. 그는 현대적 도시 주거 건축을 개척한 사람으로 유명한데, Unité d'habitation (housing unit)이란 디자인 기본개념을 창시하여 유럽 곳곳에 그의 아파트를 남겼고, 이 마르세이유 아파트가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그의 아파트들은 모두 UNESCO 문화유적으로 등재되어있다.
1층 주방과 거실

2층 침실. 중간 격벽은 철거가 가능해서 방을 넓게 하나로 쓸 수도 있다. 격벽을 설치하면 방이 아주 길어진다.



아파트의 전체 모형도이다.


소개 팜플렛

1972-1981년에 세워진 Michel Andrault와 Pierre Parat의 작품 Les pyramides, 이 또한 집단 거주지를 위한 설계이다.  Épernay , Villepinte , Évry , Champs-sur-Marne , Plaisir , Fontenay-sous-Bois 와 같은 도시에서 이 아파트 건물들을 볼 수 있다.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시트로엥 전시장이다. 찾아가봐야지 마음 먹었었는데, 일정이 결국 안맞아서 못들렸다.

휴양지 건축

가상의 도시 계획, 주거와 상업, 생산 지역이 구분되어 있다.

벨기에 엑스포의 프랑스 파빌리온. 텐트 처럼 가운데 큰 기둥을 통해 철제구조물과 유리벽을 지탱하였다. 지금은 해체되고 없다

예쁘장한 초코렛 공장

30년대 아르데코 스타일의 성당


이 성당 벽면

아랍박물관 건물의 조리개 창

에펠탑을 지탱하는 구조물들

Michel Roux-Spitz의 1920년대 아파트. 이미 이때 3-bay 개념을 도입했다니 놀랍다.

L'Anneau de la mémoire 라는 1차 세계대전 전몰자들에 대한 기념 건축이다. 영어 번역은 'Ring of Memory' 라고 한다. Ablain-Saint-Nazaire 라는 지역에 있다고 한다. Philippe Prost 라는 건축가에 의해서 설계되었으며 2014년 종전 96주년을 맞이하여 개관하였으며 모두 500개의 판넬이 있으며, 각 판넬에는 1200명의 전사자 명단이 국적과 계급에 상관없이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마지막 500번째는 비어있는데 앞으로 발굴될 전사자들을 위해 여백을 남겨놓았다고 한다.



건축박물관은 흥미롭게 봤다. 천재적인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름다움과 기능적인 면이 결합된 형태로 발휘되는 건축이란 쟝르는 매력적이다. 이렇게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한 곳 모아놓은 곳에서 전시물을을 건너다니며, 오 이런 기발한 생각을 이라고 경탄의 기회를 연달아 갖는 시간은 행복한 경험이다. 하지만, 좀 더 큐레이션에 신경을 더 썼으면 하는 생각이다. 너무 좁은 공간에 시대와 사조가 뒤섞여서, 건축 모형들을 학예회 발표 전시장 처럼 죽 늘어놓았다.

이렇게 건축박물관을 보고서, 마레지구 한 스페인 타파스집에서 펼쳐지는 jazz concert에 서둘러 가야된다 우리 딸이 보컬리스트로 출연하니 꽃다발도 사야된다. 시간이 빠듯하네

우리 딸 긴장을 했는지 약간의 실수가 있었지만, Ella Fitzgerald의 곡을  무난히 소화해낸 jazz 공연을 보고 나서, 우리 딸이 어떻게 저렇게 훌쩍 커버렸나하는 허전한 마음을 근처의 팔라팔을 저녁으로 먹으면서 달랜다.


이제 오페라 하우스로 이동한다.
굉장히 화려하므로 궁전이란 명칭을 붙이고, 게다가 건축가의 업적을 기려서 건축가의 이름을 붙여, 가르니에 궁이라고도 불린다. 노틀담, 에펠탑, 사크리뀌르 등등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파리의 대표 건물 중의 하나이다. 역시 오스만과 나폴레옹3세의 SimCity 프로젝트의 하나로 1861 ~ 1875년 동안의 건축을 하였다. 평론가들에 따라서는 그 시대 최고의 건축물로 꼽힌다. 하지만, 위 건축박물관에서 만났던 Le Corbusier는 아주 혹평을 했다고 한다.
미테랑의 SimCity로 건설된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이 1989년 개관한 이후로는 여기에서 오페라 공연을 하지는 않고 주로 발레 등을 공연한다고 한다.
조금 더 뒤로 물러서서 앞의 관광버스가 지나간 다음에 찍어야 했었는데, 이번 여행 사진들 중에서, 충분히 건물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담지 못하여 불만인 사진들 중 하나다.

루브르 조각 공원에서 봤던 조각상이라 반가웠다, 가르니에의 친구였던 조각가 Carpeaux의 "La Danse" 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3년동안 여배우들과 댄서들을 스케치했다고 한다. 이 작품이 공개되었을때, 음란한 설치물이라고 비판이 거셌었고, 누군가는 검은 잉크를 부어 작품을 훼손했다고 한다. 비판이 가라앉을 줄 모르고 비등하자, 결국 가르니에가 조각상을 교체하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보불전쟁이 터져버려 유야무야 되어버렸단다.
아니 파리에서 누드 아닌 조각상을 찾기가 더 어려운데 왜 이 조각에 대해서 그리 가혹했던 것이었을까 의아하다
현재 여기에 있는 건 검은 잉크를 뒤집어썼던 원본이 아닌 복제품이고 거뭇거뭇한 얼룩들은 잉크가 아닌 공해와 비바람 때문일 것이다. 원본은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 있고, 내가 봤던 루브르 버전도 역시 복제품이라고 한다.

이 건물 둘레로 많은 조각상들이 있는데, 몇가지만 소개하면, Jean-Joseph Perraud의 "Lyrical Drama"란 작품이다. Perraud는 당시에 최고의 명성을 얻었던 조각가였지만, 3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인기가 급격히 떨어졌다고 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잠깐 인기있는 것과 오랜 역사를 거쳐 진정한 Classic의 반열에 오르는 것에는 엄청난 격차가 있다.

아마도 앞으로 진행될 인류 역사의 상당 기간 진정한 Classic 반열에서 내려오지 않을 Bach다. Aizelin의 "The Idyll"이란 조각이 함꼐 장식되어있다.

지금도 그 격정적인 감동을 감상하는 시간이 즐거운 베토벤 흉상이다.  Louis Felix Chabaud 작품. 이 사람이 이 건물에 설치된 조각상들 중 90여개를 제작했다고 한다.

모짜르트

Eugène Guillaume의 "Instrumental Music"이란 작품. 쌍나팔을 부는 여인의 표정이 너무 심각한 것이 흥미롭다.

Pavillon de l'Empereur. 나폴레옹 3세가 오면 이쪽으로 입장해서 바로 오페라 공연장 자기 지정석으로 갈 수 있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건물인데 제정이 끝나고 3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파리 오페라 도서관 겸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Pavillon de l'Empereur 앞을 장식하고 있는 독수리 솟대(?)

역시 사치스러움의 극치의 하나로 가로등 하나 하나를 조각상으로 장식해놓았다.
내부 장식 역시 엄청난 화려함의 극치를 기대할 수 있겠지만, 오후 5시에 문을 닫는데, 우리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다음 파리 여행을 위해 남겨둔 미방문지들 중의 하나로 마음속에 등록해 놓는다. 1월1일부터 5월1일까지는 장기간 닫혀있으니 유념해야 할 것이다.
오페라의 유령의 모티브가 되었던 샹들리에가 아직도 있으려나

오른쪽 기둥 벽위에 있는 Charles Gumery작의 "poetry". 왼쪽 기둥 벽위에는 "L'Harmonie"가 있다. 이 금박을 입힌 두 조각상들이 이 건물의 사치스런 화려함을 강조하고 있다.
아래에 나폴레옹3세를 상징하는 N자가 선명하다.

여기에서 수준급의 살사를 즐기는 중년 커플. 며칠전 세느강에서도 살사 춤 파티를 하더니. 요즘 파리에 살사가 유행인가.

항상 그렇듯, 화려한 건물 계단에는 항상 사람들이 모여있다.

다음은 근처에 있는 방돔 광장 (Place Vendôme)으로 이동한다. 앙리4세와 Gabrielle d'Estrées 사이에 둔 서자 방돔의 집에서부터 광장이 형성되어 방돔이란 명칭을 얻었다.
광장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기둥식 조형물은 나폴레옹이 거둔 최고의 전승인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나폴레옹 시대에 건립된 기념비다. 맨 꼭대기에는 역시 나폴레옹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에 나폴레옹 동상은 끌어내려져서 녹여진 다음, 퐁네프 다리 위의 앙리4세 동상을 만들기 위해 활용되었다고 한다.
또 혁명과 정변으로 정권이 바뀌고 나서, 루이필립 왕과 당연히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새로운 나폴레옹 동상이 다시 꼭대기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파리꼬뮨때는 이 기둥 자체를 철거해버리자는 결정을 내린다. 이때 아무런 예술적 가치도 없고 제국주의 전쟁 아이디어를 부추키는 이 기둥 자체를 철거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 바로 꾸르베였다.
파리꼬뮨이 진압되고 나서 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던 와중에 꾸르베의 목숨은 건져졌는데, 이 기둥 철거에 대한 책임을 물어 복원비용을 통째로 부과시켜버린다. 꾸르베는 당연히 자기가 감당할 수 없으니 스위스로 망명해버리는데, 프랑스 정부는 꾸르베의 작품들을 차압해서 공사비에 조금이나마 보태도록해서 복수를 했다고.

꼬뮨 후 제3공화국에 의해 복원된 나폴레옹의 동상은 원래 나폴레옹 때 세웠던 버전, 월계관과 단검을 들고 있는 원본 모습 그대로 복제했다고 한다.

기둥을 감싸고 있는 청동판들은 전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포획한 적들의 대포를 녹여서 만든 것들이라고 한다.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은 보쥬 광장 처럼 귀족들의 주거 공간으로 개발된 건물들이다. 광장에 비가 내린다. 광장이 비에 젖어 가로등을 반사시켜내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 보았다. 그런데 우리가 비를 피하면서 사진을 찍은 이 장소는 파리의 리츠 호텔인데 세계에서 가장 고급스런 호텔 중의 하나라고 한다.

팔레루아얄 (Palais-Royal)을 찾아가자는 와이프의 다음 지령에 따라 구글맵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또 열심히 걸어갔더니, 이번 파리 여행에서 두번째로 구글맵에 속았다. 구글맵이 데려다 준 곳은 같은 이름의 우체국이었다.
다시 구글맵을 보면서 지도 상에 뭔가 왕궁같은 건물의 형상을 찾아 헤메다가 만난 Paliais-Royal 전철역이다.  왕관을 본따서 전철역 이름에 걸맞에 꾸며놓은 것 같다.

드디어 찾았다. 그런데 너무 밤중인데다가 조명도 밝지 못하고 입구도 막혀있어서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5살짜리 루이 14세가 지냈다고 해서 왕궁이란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그전에는 루이13세의 재무상이었던 리슐리외 추기경(Cardinal Richelieu)이 세워서 살았던 곳이라 추기경의 궁이라 불리웠었다고 한다. 건물은 1629년 ~ 1633년 사이에 건축가  Jacques Lemercier 에 의해 건립되었다.
그후 오를레앙가 소유 주거지가 되었다가, 오를레앙가의 후손인 루이필립2세는 이곳을 주상 복합 단지로 탈바꿈시킨다. 회랑 아래의 공간들을 상인들에게 임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140여개의 의상실, 미용실, 카페, 술집 등등이 들어서고, 고급 귀금속, 모피류, 미술품 등이 거래되었고, 사람들은 윈도우 쇼핑을 즐기면서, 현대적인 의미의 첫 쇼핑몰이 18세기 후반에 탄생하게 된 셈이었다. 귀족들과 엘리트들 뿐 아닌 중산층들도 즐겨찾는 복합 오락 공간이 되어가면서, 창녀들의 영업 공간이기도 했으며, 혁명가들의 활동의 중심지 역할도 했었다.
특히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던 때의 주인이었던 "평등의 필립 오를레앙(Philippe Égalité)"은 이 건물의 정원을 일반 시민들에게 자유로이 개방하였고 경찰의 출입이 금지되면서 점점더 혁명가들의 소굴이 되어갔다.
지금은 문화부와 헌법위원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누군가 유령 형상의 Graffiti를 남겨놓았네,

Daniel Buren이란 개념주의 미술가가 1986년에 설치한 Les Deux Plateaux (2개의 고원)라는 이름의 작품인데, Buren의 기둥들(Colonnes de Buren)이라고 더 많이 불린다고 한다. 설치될 당시 역사적인 왕궁을 현대적인 조형물이 망친다고 논란이 뜨거웠다고 한다.